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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형로 시인 / 입술 한 컷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1.

김형로 시인 / 입술 한 컷

 

 

꽃터널 지나온 여자

머리와 이마에 꽃잎 내렸다

저편서 기다리던 사내

봄 호수 같은 눈을 지나 담상담상 꽃을 따준다

 

입술로,

 

환하게 꽃잎은 돌아서 꽃잎을 달고

저들도 꽃인 양

흘러가고

 

그 꽃이 벚꽃이었는지 아닌지

꽃터널만 보면

죽도록 떠오르는 그해 봄

 

몰래 훔친 싱싱했던

 

한 컷

 

 


 

 

김형로 시인 / 이만 원

 

 

 등단했다고, 시상식에는 꼭 가봐야겠다고 서울 달동네 사는 친구가, 스무네 시간 맞교대하고 최저임금 받는 친구가, 심야 버스 편으로 돌아가 새벽 출근할 친구가, 온돌처럼 밑바닥 따신 시를 쓰라며 건네준 구겨진 봉투 하나 꽃을 못 사 왔다고 꽃값으로 생각하라고, 종일 몸으로 덥힌 만 원 한 장 오천 원 두 장

 

 


 

 

김형로 시인 / 풀의 정신

 

 

한갓 발길이 두려워서야 풀이 아니지

밝혀도 풀, 커봤자 풀이어도 그들에게는 깡이 있다 헝그리 정신으로 바람결 섀도복싱을 하는 풀들

 

이름 모를 풀을 보면 잡초라고 퉁, 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자유

 

바랭이는 방석을 깔고 어디 한번 밟아보라며 펑퍼짐한 엉덩이를 내민다 밟을수록 좋다고 대거리한다 질경이는 발에 밟히는 순간 긴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오, 내가 지구를 짋어졌구나

 

풀 한둘 뽑을 수 있지만 무성한 풀의 정신은 죽일 수 없다 배짱 없이 풀일 수 없다는 풀풀한 풀의 함수를 사람은 풀 수가 없다

 

겨울이면 사그라질 것들의 힘이란 어디서 오는 건지 밟혀도 풀, 커봤자 풀인 것들이 나무도 못 되는 것들이 거대한 생각의 나무를 심고 있다

 

풀의 가문엔 약골이 없다

 

 


 

 

김형로 시인 / 저녁에게

 

 

저녁에는 이쁜 말들이 있지요

해 질 녘 어스름이 있고요

노을도 있어요

어수룩한 집 한에는 싫지 않은 허기가 있고

자주 먼 데 내다보는

눈빛이 창가에 서 있어요

어느새 시간은 빛의 낱알로 촉각 되고

마음이 먼저 집 밖에 등을 매달아요

지독했던 하루는 꼬리를 감추고

산은 화장을 지우지요

저녁에 지친 강을 건너 당신도 오고요

숨어 있던 별이 툭툭 튀어나오는

저녁의 말들은 짧아요

설명은 낮의 일이니까요

혹여 아무도 오지 않아도 좋아요

아늑하고 검은 배후가 있으니까요

저녁엔 그냥 이렇게 말하면 돼요

당신, 오늘 좋았나요

 

 


 

김형로 시인

경남 창원 출생.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2017년 ≪시와표현≫ 신인상과 201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전 ≪부산일보≫, ≪경향신문≫ 기자.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 부산시인협회 회원. 시집으로 『미륵을 묻다』(신생, 2019년). 『백 년쯤 홀로 눈에 묻혀도 좋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