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구 시인 / 여름
여름을 그리려면 종이가 필요해
종이는 물에 녹지 않아야 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크거나 훨씬 작을 수도 있다
너무 큰 해변은 완성되지 않는다 너무 아름다운 해변은 액자에 걸면 가져가버린다
당신이 조금 느리고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 남은 검은색 파스텔로 아무도 오지 않는 바다를 그리자
당신의 여름이 기분이거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여행지라면 시원한 문장을 골라서 글로 쓸 수 있는데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좋겠다
파도가 치고 있다 누군가는 고래를 보았다며 사진을 찍거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겠지만
고래는 너무 커서 밑그림을 그릴 수 없고 모래는 너무 작아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두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이 오면 여름은 지나가고 방문을 열면 해변이 사라져서 나는 아무것도 못 그리겠지
그래도 당신과 오리발을 신고 있겠지
민구 시인 / 바벨 드는 새
건물과 건물을 잇는 고압선, 새 한 마리가 철봉을 쥐고 있다 철봉의 양 끝에 빌딩 하나씩 끼워져 있다 새가 빌딩 두 채를 송두리째 뽑아버릴 것 같은 기세로 머리와 날갯죽지를 번갈아 움직인다 저 하찮은 들썩임이 페루로 가는 차편이었다니, 이제껏 내가 숨어서 지켜본 날갯짓이 속을 전부 게워낸다 차가운 혈액을 쉼 없이 저어준다 과장이 심하다 싶어
눈앞에서 새를 지운다 비가 새는 날개,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구름, 구름 위의 발자국, 발자국에 신겨놓은 눈발을 모두 지우고, 공중에 흥건한 새의 부력을 마지막으로 박박 문지른다 산성비를 뿌려 뒤처리한다, 지워진다, 새, 전부 지워져서
새가 새의 가죽을 벗고 그림자만 남는다 그림자가 바벨을 들고 있다 바벨과 두 팔은 검은 피복을 씌운 한 가닥 전선처럼 통해 있다 그림자가 두 팔 번쩍 바벨을 들고 있다 신호가 올 때까지, 저 너머로, 잠든 심판이 붉게 부은 두 눈을 비빌 때까지
민구 시인 / 봄, 개 짖는 소리
평상에 누워 있는데 그가 으르릉거린다 눈 녹은 봉우리 위로 털을 세운다 나를 보고 입맛 다시며 저수지에 포개놓은 잉어를 먼저 채가진 않을까 강물에 앞발을 담근다
안절부절못해서 혼자 커다란 산을 뛰어다니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바위에 오줌을 갈긴다 벼락 맞은 소나무 위에 올라타 내 눈을 응시하며 이상한 자세로 들썩거린다
나를 덮치고 싶지만 목은 단단한 줄에 매여 있다
부아가 치밀어서 벚꽃과 개나리 막 얼굴을 내민 어린잎들을 더럽게 질질 흘린다 검은 나비 흰나비 개떼처럼 몰려와서 식사도 마치고 짝을 지으며 이리 와 너도 껴, 꼬드긴다
너는 오가지 못하고 심드렁하게 누워 있다 지난겨울 빙벽을 허물던 앞발을 들어 힘껏 휘두르지만 사람들 머리 위로 신선한 봄바람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복날까지 이제 석 달
『배가 산으로 간다』 , 민구, 문학동네, 2014년,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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