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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영하 시인 / 자장매(慈藏梅)*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1.

문영하 시인 / 자장매(慈藏梅)*

 

 

늦추위 잔가시로 남은 아침

통도사 마당이 환하다

 

홀아비 종수아재, 간질로 이세상 돌아서더니

발걸음 휙 돌려

영각 앞에 다시와 어정거리다가

휘어진 팔 바르르 치켜들고 감았던 눈을 뜨며

핏빛 머금은 꽃봉을 알알이 매단다

 

메꽃 같은 아내 친정으로 내몰고 오솔한 암자에

몸을 걸치더니

깃털 빠진 장끼처럼

그리움 짓이겨 청보리밭 귀퉁이에 흙집 짓더니

 

그 연(緣) 차마 못 잊어 서릿발 헤치고 지상으로 올라와

힘껏 뿜어 올리는 붉은 그늘

가슴에 쟁인 말 울걱울걱 쏟아내며

다다귀다다귀 서러운 영혼을 풀어내고 있다

 

타는 듯 신열이 온몸으로 번진 아재

분홍장삼 걸치고 구천을 넘나들며

해마다 여기 와 너풀너풀 영원을 덜어내고 있다

 

*자장율사를 기려 심었다는 양산 통도사 수령 350년의 홍매.

 

 


 

 

문영하 시인 / 발아(發芽)

 

 

톡.

묵언黙言 한 점

 

입술이 보인다

 

한살이 내력 안으로 말아

오롯이 담아낸 잘 여문

칩 하나

 

어미 앉았다 간 자리 그 모습 그대로

 

노란 치마 나부시 접는 순한 나비처럼

해마다 여기 와

어우렁더우렁 한 세상 살다 간

분꽃이라고

 

제 손으로 쓴 비문

 

生의 비밀이 기도처럼 은밀히

열리고 있다

 

 


 

 

문영하 시인 / 소쇄원(瀟灑園)*

 

 

상쾌한 바람의 집을 짓고 산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얼기설기 삭정이로 엮은 둥지

하늘 길목에 사는 나는

세상을 발 아래 두고 시를 쓰는 묵객이다

나지막한 언덕

수노루 얼굴 부비며 낮잠을 즐기는 나의 정원

검푸른 꼬랑지로 바람을 휘젓다가

사랑이 그리우면 발가락 오므리고 날개를 접는다

누추한 출입구 거적하나 달지 못한 채

신방을 차린 나는

기교 없이 솔직하게 사랑을 표현한다

깍깍 깍깍 그냥 좋다고

지나가는 구름이 기웃거려도 아랑곳 하지 않는

나는

生을 날 것으로 즐기는 유쾌한 자유주의자

기뻐도 깍깍 슬퍼도 깍깍

허공에 몸을 맡기고

무한한 삶의 의미를 두 음절에 실어낸다

 

* 양산보가 지은 전남 담양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원. ‘소쇄’는 맑고 시원하다는 뜻의 양산보의 호.

 

 


 

문영하 시인

1951년 경남 남해 출생. 2015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청동거울』『오래된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가 있음. 미네르바 시예술 아카데미상 수상. 서울시 초등교사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