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하 시인 / 자장매(慈藏梅)*
늦추위 잔가시로 남은 아침 통도사 마당이 환하다
홀아비 종수아재, 간질로 이세상 돌아서더니 발걸음 휙 돌려 영각 앞에 다시와 어정거리다가 휘어진 팔 바르르 치켜들고 감았던 눈을 뜨며 핏빛 머금은 꽃봉을 알알이 매단다
메꽃 같은 아내 친정으로 내몰고 오솔한 암자에 몸을 걸치더니 깃털 빠진 장끼처럼 그리움 짓이겨 청보리밭 귀퉁이에 흙집 짓더니
그 연(緣) 차마 못 잊어 서릿발 헤치고 지상으로 올라와 힘껏 뿜어 올리는 붉은 그늘 가슴에 쟁인 말 울걱울걱 쏟아내며 다다귀다다귀 서러운 영혼을 풀어내고 있다
타는 듯 신열이 온몸으로 번진 아재 분홍장삼 걸치고 구천을 넘나들며 해마다 여기 와 너풀너풀 영원을 덜어내고 있다
*자장율사를 기려 심었다는 양산 통도사 수령 350년의 홍매.
문영하 시인 / 발아(發芽)
톡. 묵언黙言 한 점
입술이 보인다
한살이 내력 안으로 말아 오롯이 담아낸 잘 여문 칩 하나
어미 앉았다 간 자리 그 모습 그대로
노란 치마 나부시 접는 순한 나비처럼 해마다 여기 와 어우렁더우렁 한 세상 살다 간 분꽃이라고
제 손으로 쓴 비문
生의 비밀이 기도처럼 은밀히 열리고 있다
문영하 시인 / 소쇄원(瀟灑園)*
상쾌한 바람의 집을 짓고 산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얼기설기 삭정이로 엮은 둥지 하늘 길목에 사는 나는 세상을 발 아래 두고 시를 쓰는 묵객이다 나지막한 언덕 수노루 얼굴 부비며 낮잠을 즐기는 나의 정원 검푸른 꼬랑지로 바람을 휘젓다가 사랑이 그리우면 발가락 오므리고 날개를 접는다 누추한 출입구 거적하나 달지 못한 채 신방을 차린 나는 기교 없이 솔직하게 사랑을 표현한다 깍깍 깍깍 그냥 좋다고 지나가는 구름이 기웃거려도 아랑곳 하지 않는 나는 生을 날 것으로 즐기는 유쾌한 자유주의자 기뻐도 깍깍 슬퍼도 깍깍 허공에 몸을 맡기고 무한한 삶의 의미를 두 음절에 실어낸다
* 양산보가 지은 전남 담양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원. ‘소쇄’는 맑고 시원하다는 뜻의 양산보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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