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무 시인 / 내력(來歷)
1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상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냄새의 영역이든 자기장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나는 오래 전에 그것들로부터 도망쳐 왔다 절인 고기라든지 광주리에 담긴 꽃게로부터 당도를 모르는 소금과 유향으로부터
2 누군가 나를 밀어냈듯 전혀 새로운 냄새가 나를 당겼다 그들은 북쪽 루트를 따라 내려왔다 애초에 우리가 계산법을 몰랐듯 증명되지 않는 출생도 있다 기억난다, 그 저녁의 한 때 아무다리야 강가에 다다른 그들이 내게 일러주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냄새에 대해서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어떤 꼴림과 끝도 없는 아리아, 더 이상 다루기 힘든 냄새에 대해서
3 우리는 너무 많은 길을 걸었다 모래언덕에 길게 누운 한 상인이 내게 말했다
너는 원래 사람이 아니었다 밤이면 눈 덮인 산꼭대기에 올라 하초를 드러냈었지 생의 끝장을 아는 듯 사막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다가 짐승을 만나면 마구 올라타곤 했지 그랬었지
참 좋았겠다 냄새만으로 그걸 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니 꽃들아 검둥이들아
4 날인하지 말아야 할 문서도 있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상업의 영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 걸어야 할 길은 없다 중요한 건
저기 모래언덕 위에 뜬 별 그중에서 처음으로 반짝이는 별 저 곳에서 정말 필요한 게 뭘까 뭘 팔아야 될까 쯤의 궁리 정도
류경무 시인 / 한 번도 본 적 없는 항문
한 번도 본 적 없는 항문이다 완연한 구더기 떼 부글부글 끓는 냄비밥처럼 척, 길 바깥에 안쳐진 고라니가 실실 웃고 있다
아래로부터 훑어 속을 완전히 비워내는 일 이렇듯 수승한 죽음도 몹시 가려울 때가 있다는 듯 웃음을 참으려 송곳니를 앙 다물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변신하는 중이다, 고로 죽어서 참 다행이다; 라고 이 좁아터진 콘크리트의 약사(略史)에 길이 새겨질 고라니는 한껏 끓어 넘치는 미소를 내게 쓱 날려주는데
저수지 부근을 전속력으로 뜀박질하며 되뇌노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항문이여 이제 한 마리의 전혀 새로운 얼굴이여 말해다오 언제쯤이면 멸족할 것인지 이곳의 재생산은 언제쯤 끝날 것인지
갓 태어난 돼지며 망아지며 송아지들아 저기 다 닳아빠진 광물들처럼 아프면 이제 여기서 그만 뒹굴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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