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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1주일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1.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1주일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1.10.31 발행 [1635호]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좋아하는 것은 기호에 따라서,시간이 지나면서,여건이 달라지면 변합니다. 예전에는 고기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생선을 더 좋아합니다. 기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달고 짠 음식을 잘 먹었지만 지금은 싱겁고 담백한 음식을 더 잘 먹습니다. 입맛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볼거리가 풍성한 액션이나 SF영화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주제의식 있는 영화를 더 좋아합니다. 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는 와중에도 사랑만큼은 가슴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열정이 예전 같지 않아도, 양상이 달라졌어도, 변치 않는 사랑이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럽고 기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모든 계명의 본질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계명, 세상 모든 게 바뀌어도 변치 않을 최후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은 겁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그건 오직 사랑뿐이라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한 상처 때문에 부모를 미워하고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프러포즈를 한다면,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자기 고백이 진심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사람의 사랑은 신뢰하기 쉽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존재를 제대로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도 믿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분께 감사와 사랑을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을 ‘으뜸’으로 제시하십니다. 그 사랑이 으뜸이 되려면 ‘양다리’를 걸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말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행동으로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그에 ‘버금’가는 것으로 이웃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이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웃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이웃은 나와 분명히 구분되고 단절된 ‘남’이 아닙니다. 저 멀리 떨어져 나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나와 물리적, 정서적, 영적으로 '함께' 살아가며 생각과 감정과 느낌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이웃이라고 부르지요. 이와 같은 상태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많은 지체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결국 나와 연결된 또 다른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더 열심히 한다고 생색내거나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으로 연결된 또 다른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니 기꺼이 기쁘게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랑의 효과가 우리 모두를 관통하시는 주님께 미칠 것입니다. 결국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하나’인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의 진리를 깨달은 그 율법학자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지만, 사랑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그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머리로 깨달은 사랑을 가슴으로 함께 느끼고, 내가 느낀 사랑의 기쁨이 나의 손과 발을 통해 세상에 전해져야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사랑의 신비가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