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중 시인 / 묵은 사과
주춤거리던 사과 살짝 칼등으로 사과를 노크한다 단박에 사과 칼날 들이밀면 놀라서 아픈 사과가 되겠지 근육주사를 놓듯 기억을 환기하는 게 좋겠지 묵은 사과가 육향이 짙은 것은 수치와 민망과 미안과 무안이 섞여 한 몸으로 푹, 숙성된 때문일까 사과는 좀 더듬더듬 서툴다 사과는 시야가 뚫린 고속도로처럼 탄탄대로로 사과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사과껍질이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툭 끓기곤 한다
나석중 시인 / 자작나무 인생
흰 허물을 벗는 것은 전생이 뱀이었기 때문이다
배때기로 흙을 기는 고통보다 붙박이로 서 있는 고통이 더 크리라
눈은 있어도 보지 않는다 입은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속죄를 해도 죄는 남고 허물 벗는 참회의 일생을 누가 알리
몸에 불 들어올 때나 비로소 자작자작 소리를 내는
나석중 시인 / 컷
여자가 긴 머리를 자를 때 가위를 들고 눌린 가위를 잘라요
싹둑싹둑 싹둑싹둑
제 남자를 자르는 소리 단호해요 여자의 눈썹이 젖어있어요
여자가 머리를 자를 때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가요
여자가 머리를 자르는 일은 세상에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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