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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석중 시인 / 묵은 사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1.

나석중 시인 / 묵은 사과

 

 

주춤거리던 사과

살짝 칼등으로 사과를 노크한다

단박에 사과 칼날 들이밀면 놀라서

아픈 사과가 되겠지

근육주사를 놓듯 기억을 환기하는 게 좋겠지

묵은 사과가 육향이 짙은 것은

수치와 민망과 미안과 무안이 섞여

한 몸으로 푹, 숙성된 때문일까

사과는 좀 더듬더듬 서툴다

사과는 시야가 뚫린 고속도로처럼 탄탄대로로

사과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사과껍질이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툭 끓기곤 한다

 

 


 

 

나석중 시인 / 자작나무 인생

 

 

흰 허물을 벗는 것은

전생이 뱀이었기 때문이다

 

배때기로 흙을 기는 고통보다

붙박이로 서 있는 고통이 더 크리라

 

눈은 있어도 보지 않는다

입은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속죄를 해도 죄는 남고

허물 벗는 참회의 일생을 누가 알리

 

몸에 불 들어올 때나 비로소

자작자작 소리를 내는

 

 


 

 

나석중 시인 / 컷

 

 

여자가 긴 머리를 자를 때

가위를 들고 눌린 가위를 잘라요

 

싹둑싹둑

싹둑싹둑

 

제 남자를 자르는 소리 단호해요

여자의 눈썹이 젖어있어요

 

여자가 머리를 자를 때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가요

 

여자가 머리를 자르는 일은

세상에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어요

 

 


 

나석중(羅石重) 시인

1938년 전북 김제 출생. 아호: 송재(松齋). 이리농림고등학교 졸업. 2004년 월간 『신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2005년 시집『숨소리』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목마른 돌』,『외로움에게 미안하다』,『풀꽃독경』,『물의 혀』,『촉감』『나는 그대를 쓰네』,『숨소리』와 미니시집(전자)『추자도 연가』, 디카시집(전자) 『라떼』,『그리움의 거리』가 있음. 김제문협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석맥회(石脈會)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