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대 시인 / 폐가에서
더운 여름을 핥으며 덩굴의 혓바닥이 떠나지 못한 영혼처럼 마당을 걸어다닌다
두고 간 신발 한 짝이 깨금발을 딛다가 웃자란 풀 속에 다리를 던져놓았다 밤이 되면 한쪽 다리를 끌고 창문 아래 그늘 쪽으로 가서 우는지 그늘의 벽에 물기가 비친다 떠난 이들도 밤마다 환지통을 앓을까
품었던 푸른색을 내려놓은 지붕 허공의 바람을 안고 견디던 녹슨 처마가 덩굴을 따라 흘러내리는 여름 한낮 버려진 약병 속에는 주인의 오래전 기침이 고름처럼 새어나온다 가구가 머리를 뉘며 기울어지는 소리가 덩굴에 감긴다
허공에 내장의 물기를 풀어놓고 거미가 고요히 머리를 드는 시간 폐가의 덩굴은 죽어가는 사람이 머리를 들고 마지막 오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주대 시인 / 모르는 어르신과 대화법
-할매요, 뭘 그렇게 많이 사 들고 가세요?
-누기라?
-저 예주목 사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여, 이거? 아~들 줄 끼라.
-아들요?
-손주들, 그거 뜨리 저번 주에 와써, 저 아바이 어마이 일 다닌다고 나한테 매끼노코 가 뿌리네.
-아이고, 참말로 더위에 고생 많으시네요. 키워 놓으면 보람 있을 겁니다. 근데 왜 걸어가세요?
-3시 차가 고장 나서 안 들어온다카네. 보람은 무신 노무 보람, 나 죽고 저들만 잘 살만 그기 보람이지. 차 좀 태워 주든지. 마스크 썼응께, 주사도 맞았고...
-아, 예, 예, 타세요.
-나 알아여?
-모르는데요.
-그런데 우째 잘 아는 사람처럼 말을 걸어서 아는 사람인 줄 알았네.
-할매가 막 아는 사람처럼 대답을 잘하시더만요. 하하하하.
-그럼, 저짜 봉지뫼까지만 태워 줘.
-아이고 걱정 마세요. 집까지 태워 드릴게요.
-까자 좀 샀는데 하나 주까?
-아뇨, 아뇨, 손주들 갖다 주세요. 저는 술만 먹지 과자는 안 먹어요.
-술 한잔 받아 디리야 되는데...
-젊은 여자가 사 주는 술만 마셔요.
-애이~ 하기사 그럴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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