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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원경 시인 / 어떤 사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1.

김원경 시인 / 어떤 사원

 

 

  항로를 잃은 구름이

  휠체어를 타고 어디론가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램프를 들고 어둠을 잠재우던 달빛 아래로

  물고기처럼 빛을 쪼아먹으려고

  바다가 몰려들었다

  바다는 몸속에서 굵은 선을 떼 내어

  아름다운 목선을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목선을 타고 피부가 느슨한 해안의 목을 열어

  우편물 같은 울음을 퍼내곤 했다

  밀물처럼 넘기면 넘기는 대로 뼈마디는 춤췄다

  어두운 기억이 발아래 뒤엉켜

  당신이 돌아와 눕던 곳으로

  멸종된 언어는 꼬리뼈를 뚝뚝 떨어뜨리며

  거대한 밀실이 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불을 켜고 겹겹이 타오르던 바람의 외투가 되어

  낯선 바람의 문장을 익힌 새들을 따라

  구름 위에 지문을 남기기도 하고

  바람이 남긴 긴 침묵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오래된 시는 없을 거라며

  위액같이 흘러내리는 새벽 자막 위에다

  침으로 써 놓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푸른 혈관을 열어

  물살의 발가락이 모래톱을 힘껏 움켜쥐고

  멈춰서 있는 소리를 들었다

  수초처럼 팔랑팔랑

  묵음이 거대한 소리의 춤을 추며

  귀에서, 입에서, 코에서, 땀구멍에서

  구멍이란 구멍은 다 열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계간 『다층』 2008년 겨울호 발표

 

 


 

 

김원경 시인 /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벽에 걸린 젖은 수건처럼

  밤새 앓던 몸이 허공에 가죽을 내려놓을 때

  나는 공기를 타고 몸을 찢는 수증기가 되어

  거대한 숲의 뇌수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의 파장을 끓여 짐승의 냄새를 지우면

  자잘한 뼈들이 촛농처럼 떨아지고

  겨울 숲은 환한 울음소리를 내며 발목을 끌며 지나갔다

 

  목탄으로 덧칠한 나의 대문으로

  나를 초대했던 당신이 빠져나갔다

  울창하게 자란 도시의 검은 협곡을 떠메고

  나를 버려놓은 당신이 빠져나갔다

 

  그럴 때마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로 가

  떼지어 제 뼈를 묻는다는 어느 짐승처럼

  날마다 자라는 송곳니를 분질러

  깊고 고요한 솟에 묻어 두었다가

  비밀스런 상처를 덮어주곤 했다

 

  아득한 외로움이 폭설처럼 내리는 날이면

  밀서를 전달하듯

  참혹한 활자를 뱉어냈다

  아찔하고 황홀한 절벽 아래

  내 안의 검은 밤바다가

  몸을 풀며 출렁이고 있었다

  약간의 독이 맛있다며 야금야금

  밀어密語를 뜯어먹고

 

  차가운 밀어가 만들어낸 불온한 합주가 끝나면

  나는 살아서 묘비명을 쓰다 죽을 것이다

  이 병이 나를 영영 버려놓는 순간까지

 

월간 『현대시』 2009년 6월호 발표

 

 


 

 

김원경 시인 / 미식가들

 

 

  외로운 날에는

  남몰래 비눗방울을 마셨다

 

  수천 개의 구름이 자잘한 입술을 가지고 몰려와

  나를 불어대는 찬란하고도 불안한 곡예

 

  잘도 부풀어 오르는 혈관 속에서

  허기진 향냄새가 긴 독백을 남기며 돌아다녔다

 

  수증기처럼 둥둥 떠다니며

  지상의 잘 익은 몽상을 골라 먹었다

 

  마취약이 혈관을 타고 흐를 때의 그 몽롱함이

  공기의 미세한 기류를 타고

  얇은 성대를 지나 어두운 쪽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주의 별들은 생의 단 한 번

  자신의 아름다운 긴 목을

  시식에 동참한 자들에게 대접하며

  순례자처럼 죽어갔다

 

  잘 걸어둔 영혼의 안감은

  육식(肉食)을 시식하고 나서야

  핏기가 돌며 다 함께 반짝였다

 

  미각이 뛰어난 자일수록

  혀끝에 고이는 어순에 따라 자신의 잃어버린 별자리를

  자연스럽게 잘 발음했다

 

  때론 후유증으로 발음할 때마다

  사방으로 일그러지는 멀미 자국이 번졌다

 

  그것은 경계를 넘는 자멸의 시도

 

  매일매일 날짜변경선을 넘는 새떼들처럼

  저녁의 미풍(美風) 속으로 불시착하는

 

 계간 『문학동네』 2012년 가을호 발표

 

 


 

김원경 시인

1980년 울산에서 출생. 경희대학 국문과 졸업. 2004년 《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