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온리 시인 / 코스모스와 나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1.

김온리 시인 / 코스모스와 나비

 

 

우리는 하나의 그림 속에서 동그라미를 꿈꾼다

우리라는 경계를 넘어서면

세포분열처럼 생기는 프레임 속

프레임, 꽃과 나비가 꼬리잡기를 한다

우리뿐인 우리가 없듯이 그들뿐인 그들도 없다

 

함께 혼자인 우리는

우리라는 프레임 안에서 평화롭다

내일이면 잃어버릴 꽃잎과 비에 젖을 날개를 맞대고 나란히 눕는다

일상이라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슬픔이라고 속삭인다

따로 또 같은 자세로 다른 호흡을 한다

 

동그라미가 끊어졌을 때, 너는

밀려 넘어졌다고 하고 나는 손을 놓쳤다고 느낀다

다른 그림이라고 너는 주장하지만 나는

화폭이 찢어졌다고 말한다

꽃과 나비는 각자의 프레임 속으로 걸어가고

그림자는 영원히 겹치지 않는다

 

흔들리는 노랑코스모스에 부전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접었다가 편다

코스모스와 나비와,

너와 나와,

우리와 그들의 프레임은

언제나 합이 같고 규칙은 변하지 않는다

 

 


 

 

김온리 시인 / 기일(忌日)

 

 

길이도, 굵기도 다른

다섯 발가락

 

누군가는 홀로 감당했던 가장의 무게를 소리 지르고

누군가는 서러웠던 가방끈을 다시 들썩거리고

누군가는 모기장 속 반딧불을 깜빡거리고

누군가의 눈물은 주말의 명화처럼 반복 재생되면서

 

우리는 똑같이 생긴 발가락을 양말 속에 숨긴 채

밤새도록

제각각의 아버지를 부스럭거렸다

 

 


 

 

김온리 시인 / 지워진 봄

 

 

당신을 예감하는 방향에는 바람이 있어요

 

신호등 건너편에서 얼핏 닮은 실루엣이 스친 것처럼

꽃잎이 살랑대는 얼굴을 두리번거려요

 

까닭을 품을 때 꽃은 피어나요

 

꽃은 광속으로,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려요

 

보라를 문지르면 한 획씩 나타나는 이름

 

당신이 없는 봄과 당신이 지워진 봄이

하나의 풍경으로 보일 때

 

사람을 바라보던 한 사람의 오래된 향기가 깨어나나 봐요

 

무심코 길을 걷다가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 무작정 갇혀버리듯

 

라일락이,

라일락 바람이 불어오네요

 

 

 


 

김온리 시인

부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졸업. 2016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비야, 부르면』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