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하 시인 / 붉은 소금
어제의 그가 왔다 티베트 차마고도 볼리비아 우유니 오스트리아 모짜르트 바다가 산으로 이어진 의자였던 그가 왔다 의자의 명줄이기도 했던 그가, 결코 그림자로도 드리운 적 없는 그가, 책갈피 속 행간 한 토막 낸 적 없던 그가, 왔다 창 안으로 각이 자라 꽃이 핀다 가파를수록 붉은 여정을 목도하던 그가, 이디카페 지나 투섬, 파스, 베네 너머 두리모텔을 돌아 베네치아 수로 파라다이스, 책갈피 속 한 조각 그림자로도 핀 적 없는 그가, 책상 아래 짙은 그림자 발목까지 절벽을 기어오르는 중
박산하 시인 / 모릅니다
가 알아요 자 알아요 야 알아요 C 알아요 J 알아요 U 알아요 글마 알아요 절마 알아요 일마 알아요 지붕에 파란색 칠했나요 벽에 노란색 뿌렸나요 마당에 빨간색 누가 쏟았나요 글마가 노란을 갖고 왔나요 절마가 파랑을 줬나요 일마가 빨강을 버렸나요 모르는 게 뭡니까 검정입니다 아는 게 뭡니까 하양입니다 가가 가고 야가 가고 자가 가입니까 검정입니다 일마가 절마, 글마가 일맙니까 검정입니다
박산하 시인 / 까치밥 -일백오십의 나이테를 풀다
1 민란 온다는 말에 아이도 울음을 그쳤다 몇 날 지나 녹두 한 알 꼬투리에서 튀어 나왔다 황토재 우금치서 돌아서야만 했던 봉두난발 속 그 살아있던 눈,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해 제 치레하기 바빠 까치밥도 남기지 못하던 때, 나무는 실금같은 흔적 나이테로 남겼다
오일장에서 만세를 불렀다 아우내장터서 불어온 바람은 달빛아래 그림자, 그 그림자로 마을에다 소식을 실어주었다 忠을 다한 그의 집, 사람 죽고 집이 산 것인가
남쪽 암태섬에서 팔 할의 품삯을 사 할로 내린 죽기직전의 섬사람들의 저항방식, 밟히고 밟혀도 더는 섬에서 유폐되고 싶지 않았다 나무도 만세를 부르노라 팔을 휘저었다 일백의 나이테 그렇게 누웠다 일어났다 가늘고도 연한 사람들의 일기를 대신 썼다
하현달이 떠오를 쯤 서성거리던 발자국의 비밀을, 밀주단속에 허둥대던 아낙의 얼굴을, 청솔가지 한 지게로 아궁이를 데우던 매캐한 연기를 순하게 바라보던 나무.
빛고을에 소란이 일고 주먹밥에 체루가스가 고명으로 내려앉을 때 한입 문 홍시에도 간난艱難의 냄새가 풍겼다
2 마을 흙담벽에 붉은 글 써졌다 포클레인 기사는 웅웅 공회전을 할 뿐 나아가지 못한다 소장 김씨 어디엔가 전화를 한다 코앞의 포클레인 기사 전화를 받더니 레버를 넣는다
집 무너지고 먼지 자욱한 마당에 그 아이의 증손 나타난다 포클레인 삽날에 맥없이 쓰러지는 감나무 우듬지 끄트머리 홍시하나 질질 끌려와 덤불속으로 눕는다 지상에 내려온 홍시, 일백오십의 나이테는 일그러지고
아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이 나무와 함께 했다 홍시는 한 끼 밥이었다 행여 해거리를 하면 그해 농사 또한 흉작이었으며 나이테도 생기다 말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 껍질 벗겨지는 송정, 마을 역사서인 나무도 몸을 내준다 논밭은 아파트촌이 될 터, 고샅길은 우레탄길 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생황토살 아래 돋아나는 서릿발 되어 식어간다 녹두 한 알 꽃피고 열매 맺길 기백, 싸늘한 철탑에 보금 튼 저 녹두, 이제 무슨 노래 불러야 하나
박산하 시인 / 고니의 물갈퀴를 빌려 쓰다
1 해 지고 달 뜨는 것과는 상관없다 순환, 회전, 무대만이 존재한다
육각형 나사 하나가 내 자리를 지탱한다 투명한 나무들이 밀려온다 누군가 밀고 있는 것이다 적당한 속도로 밀어야 해 잎이 돋고 수맥 돌고 하나의 잎은 또 다른 잎을 밀어내고 한 개의 나사는 또 다른 나사를 엮어내지 시시포스의 선물, 가시에 선혈이 튀기도 하지 살아 있다는 거 생각할수록 살기 위해 그 무대로 뛰어드는 거야 회전은 순종, 블랙홀처럼 빨아 당기지만 튕겨 나와야 살 수 있다는 걸 썩지 않는 소금을 썩게 하고 투명 나무가 뿌옇도록 돌아가게 하지 회전, 그 너머 이빨이 자라지 뇌腦, 심心 그사이 회전 벨트와 몸 사이, 호수에 빠진 금화 세 닢
2 고니에게 물갈퀴를 돌려준다 신발을 갈아 신는다 내 몫의 시간이 당도하면
바퀴 달린 상자에서 뿔이 돋는다 거푸집에 석고를 붓듯 딱딱한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뇌수가 흐르는 말랑한 몸. 뇌, 바람, 마음, 노을로 각각 조립된 몸, 간섭 없는 언제나 순종하는 입자가 성근, 유장한 강물처럼 흐르는 네 자유가 커질수록 내 자유가 훼손당하는 아니 현재는 1초, 0.1초, 0.001초만이 현재. 촉 닿는 너비만큼 과거가 돼버리는 바람을 탄다 표면에 깃털이 돋는다 달짝지근한 단백질을 먹고 얼굴은 순간 화석이 된다 그 새의 발이 다음 발자국을 밀어낼 때의 보폭 그 속에 들어 있는 걸 안착하는 곳에 색이 스며들지 수면은 늘 그렇게 일정한 파문만 허용하지 그렇게 몸은 제각각 조각이 나지 적당히 부푼 바퀴가 돌고 점점 얇아지는 나만의 시공. 마침내 성곽, 무너지다
박산하 시인 / 도요와 연산댁
제 몸피의 반을 버려 삼만 리를 난다는 새 삶의 반을 물속에서 살지만 물칼퀴를 키우지 않는 겸손은 멀리, 높이 날기 위한 것 칠게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부리는 더욱 길어야만 했고 길어진 만큼 휘어졌으니 말랑말랑한 땅 농사가 얼마나 질척대는지 늪에 발을 담가본 사람은 안다 갯벌은 어찌 그리도 집이 많은가 그 집들의 문이 열리는 때를 도요만이 아는 건 아니다 형산댁, 뻘배 미끄럼 타지 않으니 허릴 굽힐 일 없지만 아슴히 멀어지는 바다만큼이나 사라지는 도요의 날갰짓을 맥 놓고 본다 그녀, 허리를 펼 때면 서너 발 발치에서 현란한 부리로 농락하던 새 그래, 도요가 갯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긴다리 한번 더 꺽기 때문, 갯바람이 빰을 후려쳐도 온순해져야 한다 만경의 끝 심포, 맘껏 부리지 못한 그 바다 저리 섬들을 키우더니 이제 제 입을 막고 그녀의 입마져 막는구나 두세 평 블록 방 양철지붕 숭숭 뚫린 구멍으로 바람은 새들어오고 진수치 못한 목선은 날마다 가벼워지는데 소주잔 들린 그녀의 손, 마치 사포 같구나 하지만 심포, 생합의 명성이 시들해지는 강둑에 도로가 나고 갯벌공원 또한 생기면 좋아질 거라며, 막내가 첫 월급으로 끼워준 누런 금니를 반 이상 들내며 희죽희죽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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