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숙 시인 / 복도의 인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오래
바라본 사람은
때로 그것이 물결처럼 발목을 감싸며 휘돌아 가는 것을
느껴본 사람은
열외(列外)의 사람 이 세상의 게으름뱅이
그는 한번도 우주의 배꼽인 적 없었다
그는 그림자 깍두기 투명인간
언저리에서 흔들리다 꺼져버릴 구부러진 촛불이다 그래도 그에게만 들리는 아주 낮고 느린 음악이 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김연숙 시인 / 검은 당나귀
언제 한번 대오에 끼어 주먹 쥔 적 있던가 외쳐본 적 있던가 누군가의 연인이, 추억이 되어본 적 있던가
붉고 푸른 페인트가 칠해진 거대한 말굽자석의
푸른빛의 극에도
붉은빛의 극에도 딸려가 닿지 못한.
김연숙 시인 / 푸른 보석들의 밤
문득 타인의 그것을 바라볼 때 가슴이 매캐하고 답답해오지 스스로는 볼 수 없는 막막한 그 얼 보는 사람도 멍해지는, 영혼의 멍들
두 사람이 만나 서로 마주보는 때 하필이면 멍과 멍, 얼과 얼이 바라보게 된다면
김연숙 시인 / 핸드메이드
신의 작품은 천의무봉이라는데 우리를 빚어 하나하나 세상으로 내보내던 그때에도 그런대로 되었다, 보기에 좋다, 아쉬운 속내 감춰 좋은 얼굴로 등 투덕여 내보낸 것 아닐까 조놈은 조기가 약한데 요놈은 요기가 아슬아슬하구만 씨줄 날줄 올들이 조금씩, 조금씩 미어지고 있을 텐데 벌어지고 있을 텐데 지금도 마음 쓰며 바라보는 그 눈이 어디 혹시 있을까?
김연숙 시인 / 화살의 길
화살은 직진하지 않는다 뱀처럼 구불구불 공기 속을 뚫고 나간다 망설이며 흔들리며 길을 찾아나간다 힘껏 당겨져 활시위를 떠났더라도 제 길 찾아간다는 건 이렇게나 힘든 것
돌이킬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감각이 화살의 길을 만든다 잠시 지나치면 범하고 마는 제 안의 텅 빈 고요
오만 가지 생각들이 분자운동하는 공기의 저항 속 긴 시간은 주지 않는 대지의 인력 속을 가로질러 내 과녁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천성이 맺힌 데 없는 빈 마음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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