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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연숙 시인 / 복도의 인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1.

김연숙 시인 / 복도의 인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오래

 

바라본 사람은

 

때로 그것이 물결처럼

발목을 감싸며 휘돌아 가는 것을

 

느껴본 사람은

 

열외(列外)의 사람

이 세상의 게으름뱅이

 

그는 한번도

우주의 배꼽인 적 없었다

 

그는 그림자

깍두기

투명인간

 

언저리에서 흔들리다 꺼져버릴

구부러진 촛불이다

그래도 그에게만 들리는

아주 낮고 느린 음악이 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김연숙 시인 / 검은 당나귀

 

 

언제 한번 대오에 끼어

주먹 쥔 적 있던가

외쳐본 적 있던가

누군가의 연인이, 추억이 되어본 적 있던가

 

붉고 푸른 페인트가 칠해진

거대한 말굽자석의

 

푸른빛의 극에도

 

붉은빛의 극에도

딸려가 닿지 못한.

 

 


 

 

김연숙 시인 / 푸른 보석들의 밤

 

 

문득 타인의 그것을 바라볼 때

가슴이 매캐하고 답답해오지

스스로는 볼 수 없는

막막한 그 얼

보는 사람도 멍해지는, 영혼의 멍들

 

두 사람이 만나 서로 마주보는 때

하필이면 멍과 멍, 얼과 얼이

바라보게 된다면

 

 


 

 

김연숙 시인 / 핸드메이드

 

 

신의 작품은 천의무봉이라는데

우리를 빚어 하나하나

세상으로 내보내던 그때에도

그런대로 되었다, 보기에 좋다, 아쉬운

속내 감춰 좋은 얼굴로

등 투덕여 내보낸 것 아닐까

조놈은 조기가 약한데

요놈은 요기가 아슬아슬하구만

씨줄 날줄 올들이 조금씩, 조금씩

미어지고 있을 텐데

벌어지고 있을 텐데

지금도 마음 쓰며 바라보는 그 눈이

어디 혹시 있을까?

 

 


 

 

김연숙 시인 / 화살의 길

 

 

화살은 직진하지 않는다

뱀처럼 구불구불

공기 속을 뚫고 나간다

망설이며 흔들리며

길을 찾아나간다

힘껏 당겨져 활시위를 떠났더라도

제 길 찾아간다는 건

이렇게나 힘든 것

 

돌이킬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감각이

화살의 길을 만든다

잠시 지나치면 범하고 마는

제 안의 텅 빈 고요

 

오만 가지 생각들이 분자운동하는

공기의 저항 속

긴 시간은 주지 않는

대지의 인력 속을 가로질러

내 과녁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천성이 맺힌 데 없는

빈 마음의 나는,

 

 


 

김연숙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2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 <눈부신 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