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식 시인 / 끈
겨울산행 갔던 아버지가 하산 길에 끈 하나 주웠는데 그 끈의 끝에는 주인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는데 제복 입은 순경이 집으로 찾아오고, 늙은 아버지는 파출소로 연행되어 갔는데 춥고 배고픈 짐승에게 따듯한 국밥 한 그릇 말아준 게 무에 그리 큰 죄인지 나는 울화가 치밀도록 슬펐네
캄캄한 우주 속에 나 홀로 버려진 적 있었네 젊은 아버지는 나를 주워다가 내 배에 여자의 탯줄을 심고 따듯한 국밥을 대접하셨네 내 척추가 곧게 자랄수록 아버지의 등은 자꾸 휘어져갔네
아버지, 깊은 병석에서 환상을 자주 보시네 검은 삿갓 쓴 저승사자가 어디론가 가자, 가자, 한다 하시네 나도 이제 등이 휘기 시작한 나이, 나는 아네 아버지, 북망산으로 곧 연행되어 가실 것이네 춥고 배고픈 짐승에게 따듯한 국밥 한 그릇 말아준 게 무에 그리 큰 죄인지 나는 울화가 치밀도록 슬프네
아버지, 뒷짐 지고 겨울산행 가시네
김봉식 시인 / 호적등본
왜정시절 만주땅서 순국하셨다는 청년 조부祖父 김덕흥 씨, 중랑천으로 떠내려 온 호적등본 속에서 불쑥 걸어 나오신다. 송화강물 뚝뚝 떨어지는 창백한 손으로 경기도 광주 김씨 일가, 유실되었다던 족보 한 토막 불쑥 꺼내신다. 우리 아배 처음 귀 빠졌던 날, 청년 조부 김덕흥 씨 흥에 겨워 “어화둥둥- 우리 이뿐 새끼”하시며 미역 한 두름 둘러메고 장을 나섰다 한다. 만취한 그 밤, 오줌 누고 돌아서면 고드름 열린다는 그 만주벌판서 집으로 돌아가는 별 잃고, 한잠 주무셨다 한다. 독립투사마냥 장렬히 동사凍死하셨다 한다. 청년 조부 김덕흥씨, 고조곤히 내게 이르신다. “아가야, 아가야, 내 새끼 잘 보살펴다오” 미역두름 이제사 풀어놓고 송화강에 누우신다. 뒤척뒤척 송화강 물소리. 중랑천도 밤새도록 뒤척인다.
연말, 사무실로 배달된 부양가족 증빙용 호적등본 한 통. 그 위로 뜨거운 송화강 본류가 흐른다.
김봉식 시인 / 연리목
머리 하나가 기울어진다 다른 머리 하나도 천천히 기울어진다 공중에서 딱, 맞닥뜨린 머리 두 개 잠시 떨어졌다 다시 들러붙는다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완강한 고립의 경계선 뚫고, 저들은 어떤 꿈을 교신하며 저리 낯선 생식을 하는 것인지 기우는 生과 生이 만나 저렇듯 부름켜를 잇댈 수 있다면 우린, 생의 나이테를 힘껏 부풀릴 수 있으리
지하철, 비좁은 의자 위 머리를 맞대고 혼곤히 잠든 저 두사람
김봉식 시인 / 녹의 힘
금 간 외벽의 틈 사이 녹슨 철근을 본다 한 生의 견고한 척추였을 저것, 흔들리는 지상의 집 한 채를 천천히 내려놓고 있다 흘러내리는 녹물… 집을 떠받치던 무게중심이 지하로 스며든다 지금, 녹은 제 몸을 망치로 세차게 두들기던 쓸쓸했던 나날과 지옥처럼 활활 불타오르던 용광로의 추억을 지나 흑암의 머나먼 광맥 속으로 회귀하는 중이다
또 새벽이 오면, 녹은 제 연원을 다시 거슬러 올라와 지상의 허물어진 제 몸뚱이를 굳건히 세울 것이다 봄베이의 낯선 거리, 그늘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나에게 한쪽 뒷다리를 잃은 개가 절룩이며 안겨온다 그의 두 눈에서도 붉은 녹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김봉식 시인 / 밥 짓는 나무
한 그루 나무이고 싶네. 절해고도 위 고독한 한 그루 소나무이기 보다 하루 세 끼 스스로 밥을 짓는 나무이고 싶네 헛헛한 해거름, 땅 속 깊은 옹달샘에서 차가운 물을 긷겠네 잔뿌리를 조리 삼아 콧노래 흥얼대며 살랑살랑 한 끼 분의 양식을 씻겠네 피가 잘 돌지 않아 무감각해진 내 팔다리 몇 개쯤 뚝 뚝 분질러, 저기 저 잉걸불로 꺼져가는 태양에게서 불도 꾸어 오겠네 숲속에선 세찬 바람 불어오면 참 좋겠네 아궁이 속 내 몸뚱이가 활활 타오르겠네 자글자글 밥 끓는 냄새, 출출한 산짐승들 내 집 울타리를 슬금슬금 엿보겠네 오늘은 우듬지 끝에서 만찬을 들고 싶네 가시 돋친 말투로 톡톡 쏘아대던 새침한 아카시아 나무도 초대하고 싶네 물 오른 내 순한 잎사귀 몇 개쯤 따다가 한 쌈 푸짐하게 그녀에게 먹이고 싶네 오물거리는 앙증맞은 두 볼 슬며시 꼬집으며 사랑한다 고백도 하고 싶네 덩달아 배가 불러와 하품하는 뭇 별들 이슬로 우린 우롱차 한 잔씩 대접하겠네
밀린 월급이나 고지서 걱정도 없이 나, 그렇게 한 평생 늙어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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