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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이듬 시인 / 습기 없는 슬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1.

김이듬 시인 / 습기 없는 슬픔

 

 

   벽에 붙은 작은 사진들을 보며 걷다가 미로에 갇혔다

   조용한 여름이었다

   물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로 시작했다 나는 빈소에 있는 수많은 학생 사진을 보며 발을 옮기다가 팽목항에 도착했다 들끓는 여름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사실대로 바꾸면 나는 다시 나의 절망과 죄책감을 더욱 견딜 수 없다 딴청을 부리는

 

   나의 습관은 자유이고 말과 눈물이 말라 처진 젖처럼 처참해도 할 수 없다 지금 나는 생각이 안 날 때 하는 습관대로 주먹을 꽉 쥐고는 두 주먹을 부딪쳐 뼈를 끼워본다 표정은 항상 어긋나며 조금은 남고 조금은 모자란다

 

   못 알아듣던 아버지는 조금씩 말문도 닫으셨다 자애 등급 때문에 검사원을 만났던 날에는 그의 질문에 어찌나 대답을 잘하시던지 참았던 오줌을 누기 시작하자 반시간 동안 멈춰지지 않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의 장애 등급을 올려 지원금 받으려던 기대는 수포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나에게 되돌아왔다

   떠나겠다는 말을 하려고

   어둡고 슬프게

 

   내 머리는 받아들이는데 발끝까지 신호가 안 가서 산스크리트어를 외며 다리를 찢어보는 밤

   우울한 여름이 가고 더 우울한 달이 등 뒤에서 목을 조르는 밤 월광

   내 마음은 온몸 구석구석 흩어져 있어서 혹은 없어서 슬프지가 않다

 

   감정은 내가 가진 전부지만 설명하려면 누추

   문을 연다 닫지는 않는다 저절로 곧 닫힐 거니까

   아버지, 이 돈이 전부예요 다음 달에도 드릴게요

   나는 시작은 잘 한다 처음은 거짓말 같다

 

   나는 무에서 무를 창조하며 신보다 부자이고 신보다 고독하다

   신은 나이키

   혼자서 먹고 혼자서 걷는다 독보권을 누림

   미로 같고 구치소 같은 한밤의 복도에서

   얼마나 오래 울지 않았는지 헤아려본다

 

 


 

 

김이듬 시인 / 에튀드

 

 

삐걱거리는 마루 위를 걸어갔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굳어 있던 손가락이 움직였다

네가 올 거니까

 

정원에는 새하얀 침대 카버가 마르고 있다

긴 장마가 끝났다

어제까지 흘린 눈물과 땀이 빈틈없이 사라지는 정오

 

다시 폭풍과 기근, 역병이 올 거라는 뉴스가 들렸다

찬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유리잔을 떨어뜨렸지만

아무것도 깨지지 않았다

네가 올 거니까

 

숟가락으로 죽을 뜨며 할머니가 말한다

전쟁 중에서 결혼하고 피난 중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살아 있으면 만난다고

 

흔한 말인데 오늘따라 웃음이 난다

처음 듣는 음악처럼 귀에 들어온다

네가 올 거니까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

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연주할 곡을 고르는 동안

무한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되찾는 동안

더디게나마 네가 오고 있는 동안

 

 


 

 

김이듬 시인 /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그들은 둘러앉아 잡담을 했다

담배를 피울 때나 뒤통수를 긁을 때도 그들은 시적이었고

박수를 칠 때도 박자를 맞쳤다

수상작에 대한 논란은 애초부터 없었고

술자리에서 사고 치지 않았으며

요절한 시인들을 따라가지 않는 이유들이 분명했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연애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죽어버릴 테다

이 문장을 애용하던 그는

외국으로 나다니더니

여행책자를 출간해 한턱 쏘았다 난 안 취할 만큼 마셨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빠진 이들

그 시인들은 제 밥그릇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신촌의 작업실에서 애들이 기어다니는 방구석에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하찮아지고 있는지

뭔가 놀라운 한 줄이 흘러나오고 손끝에서

줄기와 꽃봉오리가 환해지는지

중요한 건 그런 게 없다는 것

아무리 안 죽고 난 애도의 시도 쓸 수 없고

수술을 받으며 우리들은 오래 살 것이다

연애는 없고 사랑만 있다

중요한 건 아무거도 없다

조용히 그리고 매우 빠르게

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

 

 


 

김이듬 시인

1969년 경남 진주시 출생. 2001년 《포에지》를 통해 등단. 부산대 독문과 및 경상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저서로는 시집으로『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과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 2007), 『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11)  그리고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문학동네, 2011)이  있음. 현재 경상대 국문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