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온리 시인 / 느티나무 정거장
선 체로 흔들리고 있다
가지 끝에 걸린 약속은 잠깐 앉았다 가는 어린 새의 발목처럼 부러지기 쉽다
먹구름이 몰려들 때마다 제 키만큼의 뿌리를 가진 나무에 골몰하게 된다
나는 의자 앞에 서서 길게 뻗은 나무의 뿌리를 가늠해본다
아직도 출발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는 오후,
앉고 싶어 비워 놓은 마음과 앉기 싫어 채워버린 마음이 부딪치는 줄 모르고 하마트면 앉을 뻔했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이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흔들거리는데
김온리 시인 / 패(牌)
우리는 쉽게, 각자의 손을 섞는다
너는 안개처럼 나는 붉은 장미처럼
환하고도 시들어가는 낯빛으로
너는 자꾸 쏟아질 밤을 가리키고 바닥으로 기울어진 내 눈빛은 손끝처럼 완고하다
누군가 꽃다발을 들고 창밖을 서성이는 밤,
걸음마다 차례로 켜지는 가로등처럼 일렬로 다가서는 패를 일으킨다
뒤집어지는 역방향의 카드처럼 발자국이 어긋날 때 패를 지나친 적은 없는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천천히, 서로의 손을 던져버린다
김온리 시인 / 페이스페인팅
얼굴 아닌 얼굴을 그린다
마주 보았을 때의 하이파이브를 기대하면서
발밑에는 그리다 만 얼굴이 수북하고 유리창은 자주 얼룩덜룩하다
왜 투명할수록 얼룩을 남길까, 생각하면서
립스틱을 칠하듯 얼룩을 불러낸다
얼굴을 완성하려면 더 많은 얼룩이 필요해
줄무늬로 살아나는 하양과 검정이 말발굽 소리를 내면 광장을 떼 지어 달리는 얼룩말
스크럼을 짜고 얼굴들이 소리친다 때론 우리라는 그림자가 깊다
얼굴 안에는 얼룩만 있는 것이 아니야
저녁이면 뻑뻑 문지르지만 어느새 갈기를 세우고 달려오는 얼룩말
너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로
투명이 찍힌 우리의 유리창으로
- <문학의식> 2016년, 겨울호
김온리 시인 / 코끼리와 애드벌룬
아침이면 사과가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인도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갠지스 강가에 떨어지는 사과처럼 잠이 깨곤 했다 나보다 더 느린 인도가 코를 내밀었다
가고 싶다는 말과 먹고 싶다는 말은 달랐다
사과를 베어 문 자리는 조금씩 검게 물들어갔다 부풀어 오르는 일이 조마조마해졌다
갠지스 강가를 어슬렁거리는 코끼리는 가장 인간다운 얼굴을 가졌다 그들의 코가 촛불로 피어날 때에 나는 알았다 비상하고 싶었던 건지 터뜨리고 싶었던 건지 비눗방울이 터진 후에야 알게 되는 법이다
먹고 싶다는 말과 자고 싶다는 말은 아주 달랐다
먼지를 닦으면 처음처럼 사과가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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