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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진은 시인 / 사월의 혼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0.

손진은 시인 / 사월의 혼례

 

 

둥둥, 구름이 힘찬 팡파르를 울리는 아침나절

배꽃의 즐거운 혼례가 한창이다

머릿결을 빗기는 바람과 잉잉거리는 벌떼들이

면사포의 원광을 두른 신부의 소식을

실어 나르느라 분주하다

 

턱시도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까치들과

노랑 저고리 성장盛裝한 개나리의 안내로

멀리 서풍과 구름기차를 타고 온

민들레 합창단의 똥그란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나비떼 더불고 품 넓은 하늘 속으로 울려퍼진다

 

긴긴 계절의 터널을 함께 건너온 들고양이들도

발부리를 간질이던 개미떼들도

탱자나무에 세들어 사는 참새들도 온통

그 수줍은 부케에 손수건을 흔드느라 분주하다

 

새소리 이슬 햇살을 깨물고

달디 단 공기들이 온 등성이에 불씨를 물어 나르는

사월이 눈부신 이스트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제 곧 혈관 속을 쏘다닐 찬비의 날도

구름 없는 밤 번뜩이며 천지를 가를 천둥의 시절도 오리라

허나 생이 어디 쏟아지는 우박 몇 번에 속절없이 무너질 꽃대던가

 

예나 지금이나

순결한 신부들은 대지에 맹서한 저 하얗고 영롱한 추억의 힘으로

제 울음과 사랑을 품어, 가슴에 겨드랑이에 팔다리에 머리통 굵은

새끼까지 키우며 긴 생을 견디는 것이다

 

 


 

 

손진은 시인 / 나의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

 

 

아, 그 시절 우리 안방 옷장엔

고양이 몇 마리 살고 있었더랬다

그 곁엔 눈초리 또렷한 몇몇 소녀들도

 

어머니의 손끝에서 태어난 그이들은

대낮의 분주에서 돌아와

밤이면 그곳으로 스며들곤 했던 것이다

 

옷장 속에서 살던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는

내 일기장에도

때론 새벽 내 꿈속에도 옮아붙었다

 

내 다정한 친구, 이 명상가들은 그러나

밥상에 올라앉거나

그릇을 뒤집진 않았다

 

헐렁한 시절, 자주 빠지던 가난의 늪

가끔씩 출몰하던 악어떼에 물어뜯긴

뒤꿈치, 그 휑한 구멍을

 

어머니는 꽝꽝한 겨울의 한 가운데서

헝겊이나 스웨터 자락에 가녀린 바늘로

고양이, 눈매 이쁜 소녀를 양말의 뒤꿈치에

봄을 부르는 노래와 함께 깃들게 했더랬는데

 

그 시절의 고양이와 소녀들은

이야기를 짜던 작가가 먼 길 가시고도

내 기억의 서랍 속 불씨

꺼지지 않는 불씨를 물어물어

 

봄은 온단다, 봄이 오면 뭐할 건데

때로는 말간 눈동자로 속삭이다

이젠 완연한 봄이잖아, 중년 가장 튀어나온 뱃속을 향해

짐짓 어깃장을 놓기도 하는데

 

격월간『시사사』2017. 6,7월호

 

 


 

 

손진은 시인 / 만두

- 시를 위하여

 

 

나는 속이 어른어른 비치는 만두를 좋아한다

모양을 빚기도 전에 굳어버린 반죽,

그렇다고 너무 많은 재료를 쑤셔넣어

속살이 터진 피도 좋아하지 않는다

햇볕에도 그늘에도 쉬 드러나지 않는 것

아른아른한 피를 한 입 베어물면

속이 살짝 열리고

으깨진 재료들이

차려놓은 오늘의 식탁이 보인다

자기 살이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해와 달, 다른 데서 온 낯선 것들이

서로를 붙들고 둥글게 부풀어 숨죽이고 있는

그 고통과 셀렘이 살짝 익은 것이

만두에는 들어 있어야 한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것이지만

너무 아까워 단숨에 먹지 못하는 것이거나

먹고 난 뒤에도 입속에 가슴 속에

열두 광주리의 풀무로 부풀어오르는 것

때로 잘 빚어진 것 같지만

알고보면 다른 이들이 배달해주는 쓰레기 단무지를 잔뜩 넣은 얼굴

숨도 죽지 않고 살아 자신을 드러내는 재료들

만두는 그런 것이 아니지

해와 달 그림자와 이슬,

천천히 그들이 키운 것들의 상처와 고통, 한숨도

아른아른 비치는 마음의 형상이

둥글게 부풀어오른 것이 만두의 완성이다

 

 


 

 

손진은 시인 / 길

 

 

한겨울 어린 보리는

자신의 몸 누르는 추위 견디느라

나사처럼 천천히 잎을 돌려 내민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이며 서릿발같은 것들

힘겹게 들어올리느라 머리와 몸 비틀며 키를 늘인다고 한다

그 때문에 들뜬 그의 발 한번 눌러주는 게 보리밟기다

그러다 좀 더 자란 보리는,

살얼음 칼날 추위와 눈을

살살 어르면서 그들이 내려온 길까지를 잎사귀에 꼭꼭 채울 줄도

우산 만들어 빗방울 튕길 줄도 안다

사람들 다 잠든 밤에도 통통 몸을 흔들어

생각을 키우는 보릴 보아라

보리밭이 푸르게 일렁이는 것은

하늘의 것들 다스리는 넉넉한 심성

그의 잎사귀마다 돋은 기억

바늘같은 까스러기를 다는 것도 마침내 순해진 그들과의

까슬까슬한 추억들 때문이다

잎사귀 제법 누렇게 된

보리밭의 가슴속에서 노고지리가 솟구치는 것도

눈과 얼음, 달과 비바람의 행로를 하늘 속으로 풀어놓기 위함이다

그리곤 가는 허리 황홀하게 흔들며

자신의 길을 간다

몸속은 비운 채로, 머리에는 흰 구름도 몇 걸치고

 

 


 

 

손진은 시인 / 중년

 

 

열쇠를 돌리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문득 등을 끄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간밤의 기억이

몰려온다 낭패, 눈꺼풀도 내리지 않고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는 사이 핏기를 잃어버린 내 눈알

어떤 것에 뒤집혀 긴 밤 긴 생을

후들거리는 다리와 텅 비어가는 머리도 모른 채

내 헤드라이트는 발광했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계절은 가고 주름살은 깊어졌고 흰 머리는

늘어났다 어디로 가는가 철철 넘치던 팔뚝의 푸른 힘줄은

전류처럼 터져 나오던 생기, 머릿속을 흐르던 생각은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버리고

까칠하고 초췌해진 몸뚱이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가

어저께까지도 명품이라고 믿었는데

눈 한번 들었다 내려놓는 사이

어떤 것에 취해 이렇게 떠밀려온

두드려도 가없는 무슨 소리만 내보내고 있는

 

중년을 일으키려 저기, 정비기사가 달려온다

 

또 하나의 몸이 부끄러운 듯 마중하러 간다

 

 


 

 

손진은 시인 / 숲

-序詩

 

 

부챗살모양 잎을 늘어뜨린 채

큰 나무가 그늘 드리울 때

작고 앙증한 줄기 끝에 여린 잎들이며 꽃을 매단

어린것들 날아오르려 퍼득거린다

솟아오르고 누르려는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이 두근거리는 몸짓들 사이로 스며들어

그 속에서 자라는 죽음이며 상처까지를 어루만지는 햇살

전율하는 숲이 반쯤은 솟아오르고

반쯤은 스스로를 억누를 때

열려진 사물들 속에서

잎파랑처럼 알 수 없는 느낌으로 떠는 모든 육체들

그 힘으로 구름은 하늘에 천천히 흐르고

그 힘으로 가볍게 떠 있는 공중의 새들

 

 


 

 

손진은 시인 / 풋봄

 

 

여린 추위가 남아 있는 캠퍼스

솔숲 옆 아스팔트 길에 들어서다, 어머 저것 좀 봐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학생 둘이

이제 갓 눈을 뜬 듯한, 추워서 붉은 목도리를 목에 두른

아기뱀

그 어린 강물 줄기 받으려

새로움을 잃어버린 헐거운 사십대의 사내도 거들어

백지며 책받침을 갖다대는 풍경이라니!

구불텅거리는 그 물은 그걸 타고 흘러내릴 뿐

허릴 붙잡아 보려 해도

혀의 불에 델까 움찔거리는,

오 사랑스럽고 미끄러운 울렁거림이여

결국 손아귀를 빠져나와

저녁 연기처럼 태연히 숲으로 스며드는

그 물줄기 따라가며

어머, 어쿠 어쿠! 정적을 찢으며 뿌려대는

잘 익은 소리들이 대기에다 구멍을 내는지

어떨결에 곁의 벚이며 진달래 같은 것들

몸을 막 열어놓고 꽃들을 터뜨리는 봄날 아침

봄은 그 어린 것을 앞세워서 왔던 것이다

필시 겁과 당황에 잔뜩 움츠렸을 법한 풋봄도

울창한 황홀의 가슴 풀무를 일으킬 줄 알고 있었다

 

 


 

손진은 시인

1959년 경북 안강 노당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 및 同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돌〉이 당선되어 등단.시집으로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고』『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민음사, 1992) 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 『한국 현대시의 정신과 무늬』등이 있음. 1996년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 현재 경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