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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대경 시인 / 일요일 외 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0.

서대경 시인 / 일요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목욕탕 앞이었다 이발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영 슈퍼 간판 아래 한 여인이 비눗갑을 손에 든 채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이발소 거울 앞에 앉아 그녀의 젖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면도칼이 나의 뒷덜미를 슥슥슥슥 긁을 때 하얀 와이셔츠 자락이 내 뒤에서 유령처럼 춤추고 있었다

 

전국 노래자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후 마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허공으로 상어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서대경 시인 / 요나

 

 

 요나, 들어보렴, 검은 밤, 빈 겨울 가지, 도로의 불 밝은 곳으로, 우리의 죽음이 긴 꼬리를 끌며, 어둡게 반짝이며, 멀어져가고 있어, 그해 추운 겨울, 갈 곳 없던 우리는 순환선 열차를 타고서 밤새 도시를 떠돌았지,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멀리 우뚝 선 철탑 위로 새까만 어둠이, 날갯짓하는 새처럼 몰려들곤 했었어, 눈 감으면, 은빛 가시처럼 쏟아지던 잠, 우리는 온기를 뺏기지 않으려,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병든 병아리 같았지, 졸음과 추위 속에서, 서로의 손 더듬어 찾으며, 그날 밤은 왜 그리도 길었을까, 수많은 역들이 흘러갔어, 허연 김을 내뿜으며, 차량 문이 열릴 때마다, 너는 내 품속에서 놀라며 깨어나곤 했지, 여기가 어디지, 너는 속삭였어, 그러면 나는 너의 귀에 속삭였지, 요나, 들어보렴, 서로의 잠을 들여다보며, 너와 나는 요나가 되어, 시간의 푸르스름한 숨소리를 들었지, 우리는 졸렸고, 우리는 깨어있었고, 우리는 그 뒤로 달이 지나는 구름처럼 환했어, 요나, 어두운 요나, 나부끼는 잠, 너는 듣고 있었지, 요나, 들어보렴, 그날 밤 천사의 눈처럼 우리를 응시하던 대기의 정적, 너의 눈 속으로 뻗어나가던 검은 나뭇가지, 대합실의 추위, 선로의 호각소리, 숱한 터널의 어둠 속에서, 너는 눈을 떴고, 너는 나를 바라보았고, 요나, 너는 손을 뻗어 나의 눈을 만졌지, 어둠 속에서, 요나, 너는 미소 지었고, 나는 눈을 감았지

 

계간 『시와 세계』 2014년 가을호 발표

 

 


 

 

서대경 시인 / 차단기 기둥 옆에서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 서대경,  문학동네, 2012년, 70쪽

 

 


 

서대경 시인

1976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영문과 졸업. 2004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문학동네, 2012)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