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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지하선 시인 / 단테라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30.

지하선 시인 / 단테라스*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가장 신성하면서도

가장 세속적인 신神

황금

그는 태양과 함께 떠오르는 환생의 신이라네

 

그가 지닌 비장의 명검名劍, 영원한 빛깔을

현란하게 휘둘러 숭배의 눈을 찌르기도 하고

 

속속들이 악취 나는 욕망의 치부

번쩍번쩍 황금 돔으로 위장해 주기도 한다네

 

그가 내뿜는 입김이 벽이 되었다가 문이 되기도 하는

맹신盲信들

칼끝의 꿀을 빨듯 그 맛에 중독되어 피똥을 배설하면서

오장육부 썩어 문드러져도

거듭거듭 환생할거라며

매일

찬란한 꿈을 꾼다네

 

윤회輪廻의 길 위에서

부처가 된다고

 

*인도 빛의 축제, 디왈리(Diwali)에서 첫째 날로 금을 사는 날

 

 


 

 

지하선 시인 / 워터소믈리에(water sommelier)*에게 2

 

 

아슬한 우주 끝에서 당신의 혀에 안겨요

당신은 고요롭게 쉬어 가라지만 첫날밤 신부처럼 떨려요

내 안 깊숙이 촉수를 뻗어 불온한 내면까지 속속들이 파헤치려는

당신, 잠깐만

착각으로 살아가는 내 마지막 한 점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어요

내가 곧 자연이며 태초의 순수 DNA라고 누대에 전하고 싶거든요

나만의 독특한, 그 형용할 수 없는 달콤 짜릿한 내 안에서는

당신이 탄생시킨 신비한 별이 소멸되기도 하지요

나의 흔적이 당신의 혀에 잠시만 찍혀 있어도

당신은 나의 영향권에서 멀어질 수 없다는 것 아시나요

나는 계속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니까요

나를 넘어서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정의 내리기 위해

성급한 시간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제발, 내 이름 안에 나를 가두려 하지 마세요

 

나의 전생은 위대한 힘을 흠모하는 열렬한 빛이거든요

 

*물맛 감별사

 

 


 

 

지하선 시인 / 흉터

 

 

배꼽아래 몸부림치는 핏빛 각인,

어미의 목숨대신에 엄지 손톱만한 생명을

묻어야 했던 참담한 무덤이다

 

가끔씩 날궂이 하듯

허연 달빛을 들이키는 들고양이 소리에도

저릿저릿 감전되는 명치끝이 바스슥 타들어가는

날이면, 쿵 쿵 대못 박히는 심장소리에

무덤이 깨어나고

주술처럼 맴도는 옹아리가

컴컴한 기억을 후벼판다

뒤틀리고 뭉개진 비문碑文에

꿈속에서나 귀를 대보기도 하는데

텅 빈 밤을 빨아대는 아기 울음이 들리는 듯

처절한 침묵에 짓눌린 피투성이가 보이는 듯

사라진 과거를 돌이키려고 허우적거리다가

허궁으로 빠져든다

 

지구 바깥

무의식의 경계 저 편

어디선가

살이 찢기는 시간의

날카로운 흐느낌이 들린다

 

 


 

 

지하선 시인 /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거울 속, 태양계 저편의 아득한 시간을 들여다본다

희미한 반만년이 손끝에 걸린다

 

겹겹으로 녹 쓴 시간을 끌어당겨 스윽슥 문질러 본다

침묵의 안쪽 깊은 심저에서 푸른 문양으로 떠돌던 그가

두터운 시공을 걷어내며 어른거린다

빗살무늬 세월이 내 귀를 더듬자 그의 발자국 소리 들린다

사랑이라는 말 그 알맹이를 찾아 수 천 년 헤집어대던

12궁 별자리 열리고 그의 전생과 후생이 출렁거린다

동심원을 그리며 나와 맞닿는 순간

내 몸속에서도 예리하게 벼린 연민의 정이

나의 전생을 데리고 그를 향해 가는 것이다

이승의 뒤편에서 어둠을 휘감는 숨결 낯설지 않다

죽은 이름을 부르는 금속성의 울음이 시리게 파고든다

내 삶 어느 구석에 화석으로 굳어있던 이별의 무늬 설핏한데

한 소절 부르다만 마지막 그의 노래가 비명처럼 목젖에 걸린다

 

몇 만 년 전

그날의 해후가 재생되는 소리

무덤을 흔들며 따갑게 등골을 쑤셔대는데

 

나는 비몽사몽

그의 주술 속에서 헤매는 중

 

 


 

 

지하선 시인 / 미이라놀이

 

 

몇 천 년 개켜 놓았던 죽음을 한 꺼풀씩 벗기며

게임을 해요

 

두터운 어둠이 감춰놓은 전생이 한 컷씩 이승으로

전송될 때마다 이집트 왕조였다는 스펙은 공주로

부풀려지고 뜨겁게 돌아가는 눈빛들의 지폐가

게임상자에 쌓여가죠

 

눈부신 햇살이 환생의 미로를 더듬어가요

원시벽화처럼 길 잃은 발자국을 긁어내고

허방이 된 몸 안으로 잃어버린 계절을 들여보내요

그의 목줄을 잡고 있던 침묵의 껍질을 벗기니

보일락 말락 달싹이는 입술을 비집고

신음으로 드러나는 속살의 기억이 질질 끌려 나와요

부드러운 가슴의 곡선에서 허벅지까지 죽음이 흘러내려요

불안하게 일렁이는 사타구니의 주름살이 보여요

팽팽해지는 긴장감이 공주라는 마지막 자존심 한 장을

들춰내는 순간,

 

게임은 끝나고

 

긴긴 그늘 속에서 숨죽였던 남근男根이

신열을 앓듯 소용돌이치며 지구 최초의 성기인양

태양을 향해 불을 지펴요

 

충격 먹은 지폐들은 허공으로 마구 날아오르고

강한 독성의 주검 냄새 어디선가 몰려와요

 

지하선 시집<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하다>에서

 

 


 

지하선 시인

2004년 《수필춘추》로 수필 등단. 2008년 《미네르바》 신인상 시 등단.  시집으로 『소리를 키우는 침묵』,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하다』가 있음.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지원, 도서관,「내 생애 첫 작가수업」 선정 문학작가 창작기금수혜.  현재 성동문인협회 회장, 미네르바 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서울지부 이사, 개포도서관 문예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