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세복 시인 / 당신을 송두리째
가게에 갔네 물건 하나 없는 진열장, 버리러 간 내게 주인은 자꾸 당신을 떠올리라 했네 어림없었네 감히 쉽게 당신을 내놓을 것 같은지, 들꽃보다는 조금 화려한 꽃 이야기를 했네 구름이 적당히 피어 있는 여름날, 해가 잠깐 사라진 하늘, 꽃잎에 햇빛이 다시 살짝 비출 때 분명 빗방울이 한 낱도 내리지 않았는데도 반짝! 하는 눈동자가 있었, 내 눈에도 반짝, 주인은 등을 다독였지만 괜찮았네 그냥 다른 이야기를 한다 했네 산길이었던 것 같네 가지 않고 주저앉을 수 없는 노릇, 무작정 걷고 있었네 가시 덩굴 헤치다보니 다리 긁히고 손등에서 떨어지는 피, 온몸이 쓰라렸지만 아무렇지 않았네 어차피 절벽에 누가 먼저 와 서 있었, 그냥 다음에 다시 오겠다 했네 그때는 당신을 두고 올 거라 했네 가게를 나서다보니 흰 가운의 주인은 간 데 없고 당신만 온통 하얗게 진열되어 있었네
배세복 시인 / 무제
따라오라던 말 들어오라던 말 괜찮다던 말 얼마나 컸나 만져보자던 말 자기 것도 만져 보라던 말 뜨겁지 않냐고 묻던 말 너도 나중에 이렇게 커진다던 말 남자끼리는 상관없다던 말 아무 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던 말 누구에게도 애기하지 말라던 말 사나이는 어디다 말하고 다니는 거 아니라던 말 제 기분을 내게 강요하던 말 더 이상 기억에 담고 싶지 않은 말 지우고 싶은 말 선생의 존경심 따위 모두 날려버린 말 어른이 된다는 기대감 따위 모두 앗아간 말 그때 당신에게 하지 못한 말 내 기분은 당신의 그것 같았다는 말 정말이지 네 뱀 대가리와 같다는 말
-시집『목화밭 목화밭』
배세복 시인 / 는개라는 개
사내가 창밖을 내다보니 벤치에 개 한 마리 엎드려 있었다 젖은 몸이 어딜 쏘다니다 돌아왔는지 가로등 불빛에 쉽게 들통 났다 서서히 고개 돌려보니 곳곳에 개들이 눈에 띄었다 야외 체력단련기구 위에도 지친 여러 마리의 개들 차가운 철제 의자에 젖어 있었다
당신이 떠난 후로 습관처럼 밤은 또 개를 낳았다 그것들은 흐리고 가는 울음이다가 가끔은 말도 안 되게 짖기도 한다 어떤 밤은 안개라는 이름으로 부옇게 또 다른 밤은 번개로 울부짖다가 이 밤은 그냥 조용한 는개 된다 너는 개다 너는개다 너 는개다 이 정도면 키울 수 있겠다 싶어 사내가 불을 끈다 천천히 이불 당긴다
배세복 시인 / 송화(松畵) 한 폭
봄이라며 당신은 목련꽃 봉오리를 보내주셨지만요 저는 캔버스에 솔잎을 그려넣고 있어요 며칠 뒤면 또 제법 벙근 꽃잎을 보낼 테지요 그때 쯤이면 저는 잔솔가지를 그릴 겁니다 어찌 목련꽃뿐이겠어요 산수유꽃일까요 생강나무꽃일까요 아무튼 노란 꽃잎에 살짝 현기증이 나겠지요 그러면 저는 오히려 지난 겨울 솔바람 소리 모으던 당신의 차가운 응달 떠올릴 겁니다 처마 밑 고드름 녹이던 바람도 눈 쌓인 그늘에서는 꽁꽁 얼어붙고 말았었지요 멀리서도 내 셈을 알아차린다는 듯 당신은 꽃무릇이며 꽃창포 따위를 줄곧 보내며 꽃그림을 종용하겠지요 그러면 저는 소소리바람 쓸려 송홧가루 날리는 소나무숲 그걸 그릴 수밖에요 어쩌면 당신이 빚은 계절엔 꽃나비도 묻어오겠지만 소나무에 그런 것들이 가당키나 하겠어요? 허허 내 정원에는 침엽수가 없어! 언젠가 자랑스레 당신이 말했지만 제 캔버스엔 솔잎만 무성한 걸요 바늘만 솟아있는 그림을 왜 새기느냐 묻는다면 당신도 알잖아요 곁을 주지 않았기에 당신은 침엽(針葉)이니까요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당신은 환영(幻影)이니까요
배세복 시인 / 사구 너머 사구
저 선수 본 적 있네 연갈색 유니폼의 선수, 신두리 바다는 푸른 그라운드 펼쳐 보이고 그는 자꾸 타석에 서네 온몸으로 또 사구 받아 내네 저 타자, 오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슥슥 엉덩이 문지르네 겅중겅중 모래밭으로 달려가네 팀을 위한 출루 의지는 그의 오랜 습관 한번은 그런 적 있었네 태풍에 실려 온 엄청난 속도의 까치놀이 그의 후두부를 공략했네 악! 소리 지르며 비틀거리던 그가 투수에게 달려들었네, 달려갔으나 모두 그를 말렸고 함께 떠밀려 온 이들, 쯧쯧 오죽 아프면 저럴까! 혀를 차기 일쑤였네 이를테면 그것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한 일, 그러므로 사구 최고기록을 갖고 있는 그는 오늘도 무수히 매를 맞네 파도에 쓸리고 다시 바람에 부딪혀 어딘가로 실려 가네 한참 동안 멍을 풀더니 저만치서 언덕 이루네 저녁 내내 두드려 주고 싶은 사르르 저 엉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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