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욱 시인 / 광시곡의 밤
구름 한 장 담은 백지와 한없는 길을 돌돌 말아 내는 만년필로 방안이 어두웠다 밝아진다. 집과 집 사이 방안 천장까지 비가 뭉쳤다. 뾰족하고 높다란 탑이 없더라도 종을 울려 저녁을 선포할 시간이 왔다. 우는 사람을 잠재우고 웃음을 저만치 멈춰놓는다. 시간의 무늬를 따라 구름이 정확히 회전한다. 대낮의 열기도 가만히 숨죽이고 방안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젖은 심장에 낚싯줄 달아 출렁이는 바닥 아래로 내려 보내면, 심해어들이 환멸 깊은 곳에서 죽어가는 자의 가죽을 뚫고 방안 가득 솟아오른다. 갱도를 빠져나온 번쩍이는 그림자의 놀라운 깊이는 작은 유리창에 붙은 별이 잘 안다.
긴 장마가 물러간 후 벽에 핀 누룩곰팡이를 꽃이라 부르며 지운다.
― 『라디오무덤』, 현대시. 2016.
김제욱 시인 / 라디오무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 -김수영
나는, 주파수가 잘 잡히지 않는 노이즈. 지직거림의 전문가이지.
낡은 지도 한 장 구멍 난 양만 두 켤레 다 떨어진 노트 뒤축 없는 신발을 신고 전설의 라디오 무덤을 찾아 도시를 헤매지. 볼품없는 옷차람 허기진 몸 코일 회로 같은 노이즈를 따라가면 이름 없는 고물상, 라디오 무덤이 나오지.
구리선이 보여? 스피커…… 레버…… 게르나뮴 다이오드……
배터리가 없어도 끊임없이 노이즈가 새어 나오는 폐라디오. 다 부서져 형체를 알 수 없는 폐라디오. 라디오라 할 수 없는 라디오. 지지직… 지직… 지지직직… 지지직… 주파수를 맞추면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는 노이즈가 금속 탐지기처럼 끊어오르지.
폐라디오여 입을 열어라. 내 그 속에서 떨리는 노이즈의 진공관을 꺼내겠다. 도시의 끝 사그러져 가는 폐라디오. 납땜하는 거 안 지겨워? 지겨워. 그거 고쳐서 뭐 할건대? 노이즈를 배부르게 먹고 밤의 플랫폼에서 시그널 음악을 듣지.
나는 낡은 지도 한 장 구멍 난 양말 두 켤레 다 떨어진 노트 뒤축 없는 신발을 신고 전설의 라디오 무덤을 찾아 도시를 헤매지. 오늘 내 라디오는 구닥다리 광석 라디오. 노이즈의 왕이지.
부러진 안테나가 보여? 여기는 지도에도 없는 재개발 철거지역. 도시의 내장이 드러난 곳. 나는 그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라디오를 발견하지.
김제욱 시인 / 저녁 7시
음악은 믿음 이전의 예술. 그러니까 하늘 아래 새로운 멜로디는 없다. 프로펠러 같은 기술이 있을 뿐 어디에도 새들의 지저귐은 없다. 나는 어느새 익숙한 귀가 되었다. 그나마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저녁 7시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누구도 음표를 놓고 첨탑을 쌓으려 하지 않는다. 장르가 사라지자 음악의 귀족들은 홀연히 지층으로 사라졌다.
집시의 노래가 방랑자의 호롱불이 되는 시절이 있었다. 첨탑을 오르던 소리는 다시 아프리카 정글로 가고 있다. 피아노 검은 막대기와 흰 막대기가 펼치는 테크니컬. 유폐된 놀이, 그로 인해 나는 손가락에서 태어난 규칙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저녁 7시를 사랑한다.
음의 수학적 놀이.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이다. C는 안정, Bb는 슬픔, Dm는 다채로움, 나는 Am의 괴이함까지 사랑할 수 있다. 이건 오랜 역사의 수긍일 수 있다. 그래서 단음으로 이뤄지는 음들의 최고의 신비는 저녁 7시에 완성되는 것이다.
천사들의 날개처럼 마을을 하얀 진공으로 만드는 저녁 예배당 종소리, 힘 있는 사내가 바이올린의 허리를 꺾어 활로 현을 키며 오르내리는 신음소리, 고문을 당하는 죄수의 비명소리, 애원하는 몸을 향해 발사된 총포 소리, 나뭇가지 사이를 오르내리는 새의 날개 소리. 오래된 수도꼭지에서 벽 속 하수구 관을 타고 와 떨어지는 방울 소리. 이 모든 소리가 저녁 7시를 예비한다. 소리를 도저히 새장 속에 가둬둘 수 없을 때 네가 온다, 저녁 7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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