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윤숙 시인 / 벽과 담의 차이
우리의 이야기는 지붕 속에서 산다 지붕을 가지고 있는 벽과 지붕이 없는 담 안엔 사슴벌레 달팽이 사금파리 장지뱀 등 여러 종류가 산다 벽은 못, 시렁 아버지의 맥고모자 달력의 날짜로 불리기도 한다 드나들거나 넘을 수 있는 높이의 담은 그림자와 낙서의 한 영역이다 벽은 문 없는 간극과 문의 사고가 가끔 어긋나기도 하지만 옷들은 그 사이에서 잘 기대어 무늬를 새긴다 담을 넘어간 소리는 키 큰 소문이 되고 담 밖에 있던 사람이 훗날 벽의 못에 걸리기도 한다 담은 올록볼록한 퍼즐 같다 퍼즐을 맞추려 틈새의 흐름을 허용한다 그 사이로 번식하고 바람이 드나들며 물길도 흐른다 구멍이 없어 마음, 다만 낙서로 대신하는 일들이 있고 수직의 소문들이 넓다 커다란 순록을 보면 따뜻한 벽이 생각난다 그들은 스스로 진화된 지붕을 가지고 있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뿔로 계절은 완성되고 빨강은 절판된다 숲은 담이다 나무들은 지붕이 없으므로 흔들린다 이야기가 없을 때는 흔들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2015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봉윤숙 시인 / 주량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처음 술을 마셨다 엄격한 손바닥 하나가 붉게 손상되자 자꾸 헛소리가 나왔다 아버지는 내 속에 들어와 비틀거리며 자꾸 울려고 한다 부계를 살피면 정승도 부자도 없지만 허름한 탁자와 술잔은 없다 술을 마시면 늘 친구를 잃어버리는 아버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어느 곳에 감춰놓고 밤새 마을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술 취한 자신을 친구라 굳게 믿었다 어쩌다 비틀거리는 비밀을 세상천지에 풀어놨을까 집안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졌지만 소주 하나에 안주 하나만 시켜놓으면 다 들통날 서글프고 빈약한 비밀들을 왜 함부로 들이켰을까
아버지에게 맡겨놓았던 미성년 찾아오던 날 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나는 아버지를 못 견디고 결국 집 앞에 당도해 아버지를 토하고 말았다 누구나 어느 시절의 행동들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듯 비틀거리는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아버지의 누추하고 쓸쓸한 주량 알 것 같다
아버지, 기분 좋았던 일생이 이렇게 허름한 가격이었다는 것 소주에 김치 쪼가리 하나밖에 안 되는 빈약한 가격이라는 것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주량이 있다
봉윤숙 시집 『꽃 앞의 계절』, 《한국문연》에서
봉윤숙 시인 / 넝쿨
눈꺼풀을 내려 눈동자를 덮는 외면의 면상(面像)
대륙의 순례를 도는 코끼리의 축을 중심으로 곡선이 난무하다 침묵의 회오리들 조용하고 완만한 걸음이 당돌하다
푸른 문종이를 바르지 않은 고립의 문, 싹둑 잘리거나 묻히기도 하는 출구 손사래로 답하는 늙수그레한 점층법 숨겨진 줄기는 어디로 뻗어있을까
실타래를 풀어 붉은 꽃을 피운 자귀나무 양쪽 잎사귀들이 등을 맞대며 밤을 지내고 줄기로 절굿공이를 만드는 화목의 전설이 두리번두리번 불꽃처럼 치솟는다
넝쿨의 계절 빨갛고 노란 경계마다 차오르는 물 얼기설기 엮인 배후엔 정물을 허무는 소란이 있고 줄기가 걷히는 순간 줄거리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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