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욱 시인 / 헬륨은 기분 나빠
빌딩들 사이 떠오른 하늘 여행자의 우울한 입김이야. 음울한 코발트블루.
저 세상에서 건너오는 차가운 숨소리. 중독성이 강한 사물의 침묵들. 증발하는 한 사내가 남긴 그림자.
오글거리며 발광하는 고양이의 눈. 위태한 불빛을 따라 중앙선을 걷는 지금.
내 몸을 스스로 지울 수 있다는 것. 이제는 지겨워. 아스팔트의 늪에 점점 깊게 발걸음이 깊게 빠져들고 있어.
투명한 발목부터, 비어버린 가슴, 타오르는 목 중독이 강한 죽은 자의 말. 지금도 어둠 속에서도 최면을 걸어.
토막 난 구름의 잔향. 저 높은 비린내를 감당할 수 없어.
헤드폰 스피커 구멍 속으로 숨어들래. 고양이의 입 속으로 빠져들래. 아지랑이 속으로 타오를래.
번개를 머리에 단 응급실 자동차가 취한 아스팔트를 혓바닥으로 힘껏 말아 쥐었다 펴가며 달려간다. 터진다.
헬륨 풍선처럼 펑!
김제욱 시인 / 코끼리 송곳니
나사를 조여 코끼리를 결박한다.모니터에 이름을 입력하자회전 바늘 톱날이 내려온다.
반듯한 이마에 새겨지는 글자들면밀한 기계 움직임 따라갉아 빠지고 진동하는 송곳니. 대지 위에 하늘 찌르던 자존심이울음소리에 가득하다.
고대인은 억센 손길로거북이 등껍질에 죽음 너머 전하는 소망을 담아 길흉화복의 지도를 새겼을 것이다.
음각 이마에 첫 인주를 묻혀창호지에 눌러 찍는 코끼리 발자국육중한 호흡까지 단단하게 내려 찍힌다.
도장 가게를 나서는데밀렵꾼을 피해 도망치던 야생 울음소리가주머니에 불룩 담겼다.
김제욱 시인 / 책다듬이 벌레
그거 아세요? 얇은 종이 이불을 덮으면 얼마나 따뜻한지요. 글자들 사이에 숨죽인 내 모습을 바라봐요. 물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더듬이며, 눈이며, 배, 다리들. 온전한 경계도 날갯짓 소리도 없이 한때 몸통을 이뤘던 마디들이 이리저리 화해하며 맞닿아 있어요. 이미 떠나버린 그대 모습인가요. 내 머리 세상에 디밀기 전에 사라진 그대를 지금 내 앞에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거든요. 지난날 나도 모르게 그대가 놓은 백지 위에 찍힌 글자들. 그 행로를 따라 호흡을 이어가면 인지의 틈에 빠져 마주한 얼굴에 갇히게 돼요. 살다보면 만남과 헤어짐도 순간이죠. 사방이 벼랑인 두꺼운 책 한 페이지에서 돌아선 발걸음조차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천장과 바닥이 맞닿는 책장을 덮어요. 순간, 그대의 목소리가 들리죠. 그것도 잠시. 열린 문은 언제든 잠기기 마련 아닌가요. 그대를 즐거운 나의 집에 초대해요. 글자들이 횡대로 늘어서 있어요. 나의 군사들이죠. 그들이 길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집은 늘 길 위에 있어요. 그 구부러진 길들이 어찌나 시간을 잘 포개어 놓았는지 여러 얼굴들이 떠올라요.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요. 왜냐하면요. 우리 집 한 모퉁이를 이야기하는 지금에도 그대가 찾고 있던 수많은 글자들을 선물로 건네고 있어요.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 탈출도 허용치 않던 굳은 시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잃어버린 목소리의 실타래를 풀 수 있을지도 몰라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석중 시인 / 묵은 사과 외 2편 (0) | 2021.11.01 |
---|---|
김주대 시인 / 폐가에서 외 1편 (0) | 2021.11.01 |
구효경 시인 / 소등 (0) | 2021.11.01 |
김원경 시인 / 어떤 사원 외 2편 (0) | 2021.11.01 |
김온리 시인 / 코스모스와 나비 외 2편 (0) | 2021.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