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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인채 시인 / 삭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7.

류인채 시인 / 삭제

 

 

시상(詩想)을 적은 메모 수백 편이 날아갔다

다음 카페 글 보관함을 실수로 삭제했다

 

완두콩 같은 새날이 날아가고

보도블록을 걷다가 구두굽이 빠지던 날이 날아갔다

동생만 보는 어머니의 눈과

몰래 대출받고 변명하는 남편의 입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딸의 가슴이 날아갔다

울릉도 밤바다 어화 등불 날아가고

미케 비치의 해돋이

산타모니카 잔교 바다사자 울음이 날아가고

 

한 우주가 날아갔다

 

더듬더듬 일어나 구름 한 컵 마신다

늦가을 공원이 축축하다

 

 


 

 

류인채 시인 / 자작나무

 

 

나무에게도 눈물이 있을까

그저 잎새가 노래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뿐인데

내 눈에는 끝없는 흐느낌처럼 보인다

 

커다란 눈마다 눈물 그렁그렁

죄를 고백할 때마다 몸은 하늘로 더 솟아오르고

몸빛은 하얗다

 

빽빽이 들어찬 회개의 숲

 

저 하얀 고백 위에서 새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운다

나무의 말을 주워섬기듯

들쥐가 나무의 발밑을 파고 있다

 

나도 한 그루의 나무로 서 있다

 

 


 

류인채 시인

충남 청양에서 출생. 인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전공 문학박사. 2014년 《문학청춘》 신인상 수상. 2014년 인천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나는 가시연꽃이 그립다』(1998), 『소리의 거처』(2014)가 있음.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