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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광찬 시인 / 프로아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5.

이광찬 시인 / 프로아나*

 

 

하품하는 정육점 여인의 입 속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권태의 편육들. 삶과 죽음의 근수를 정확히 재는 저울이 있다면, 저 영혼의 무게는 과연 몇 g이나 될까?

 

여전히 비대한 당신, 당신이 나를 거부한다.

 

* 프로아나(pro-ana) - 거식증을 동경하는 사람들.

 

- 2009 [서시] 겨울호

 

 


 

 

이광찬 시인 / 구멍의 계통수

 

 

수 세기 동안 밤은 어둠을 낭비했다. 바다는 파도를 낭비하고, 시계는 틈틈이 시간을 낭비했다. 낭비하고 낭비하고, 분비하고 분비하고, 내 불알 밑은 점점 부실한 정자들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오늘 나는 20년 넘게 부어온 적금을 깼다. 한 여자를 위해. 그러므로 마이너스 통장 잔고에 구멍을 내는 0은 부실한 정자가 건실한 난자를 만나는, 원스톱 대출경로인 셈이다.

 

달거리는 이제 더 이상 여자만 누리는 사치가 아니다. 적어도 한달에 한 번, 나는 가까운 정자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한다. 종족본능은 애당초 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고적부터 우리는 로또같은 확률로 도박을 했는지 모른다. 모든 구멍과 부실은 여자와 한 통속이다. 불임不姙은 어느 낭비벽이 심한 구멍의 비참한 말로末路이다.

 

어둠이 낭비하고 있는 구멍 속에는, 권총이 난사한 총알 자국이 여러 개 박혀 있다. 죽음을 낭비한 자들의 삶 속에도 이런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여명은, 밤이 어둠을 몽땅 탕진했을 때 받는 개평 같은 것이다.  

 

- 2009 [서시] 겨울호

 

 


 

 

이광찬 시인 / 관성의 법칙

 

 

미안, 멈출 수가 없었어. 나도 나를 어쩔 수가 없었어. 내 안에서 나를 미치게 하는 생각들, 직진! - 까짓거 죽기야 하겠어? 그래, 갈 때까지 함 가보는 거야. - 궁리 끝에 그 생각들을 끄집어 내기로 했지. 달리는 속도 안에서 나는 가장 안전하다고 느꼈어. 브레이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지. 이상하게도 멈추지 않을 거란 생각이, 멈출 수 없단 사실을 더욱 부추겼어. 급기야 생각을 멈추게 한 건 나도, 미쳐 날뛰던 세상도, 외부의 어떤 저항도 아닌, 돌진하는 속도 그 자체였어. 지금껏 나를 굴려온 생각들, 나를 살게 한 바로 그 힘! 쾅하고, 머리 밖으로 튕겨져 나간 생각들은, 성난 황소를 몰고 달린 나의 고집불통이었어. 알맹이와 껍데기가 분리된 채……, 그게 바로 나였어.

 

- 2009 시산맥 창간호

 

 


 

 

이광찬 시인 / 향기를 보다

 

 

1.

見香停*에서 바라본 향기는 고요하였다. 연잎을 우려낸 차맛은 맑고도 경건했다. 찻잔에 합장하듯 두 손 모으면 절밥처럼 담백한 스님의 온화한 미소가 방죽 안에 차고 넘쳤다. 입 안 가득, 활짝 피어난 연꽃들은 수줍은 듯 말이 없었다.

 

2.

첫 새벽, 뜰 안을 거닐던 바람이 굳게 다문 연꽃의 꽃잎 하나, 이파리 한 장 깨우지 못하고 자취를 감출 때 혹은 저기 저, 수천 봉오리의 닫힌 귀가 열리고 못 안의 백련들이 억겁의 시간을 뚫고 수면 위로 올라와 꽃을 피운 것은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3.

아침저녁, 물빛에 어룽진 제 모습 굽어보며 구석진 몸을 씻고 있는 나무들. 킁킁, 나무의 물관은 이미 오래 전 죽은 자신의 발냄새를 길어올린다. 깊은 심연 속 물풀의 흐느낌마저 뿌리내리지 않아도 다 짐작할 수 있다는 듯 바람은 방죽 위 햇살을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4.

풍경이 소리없이 스미는 이승의 절간. 뉘 집 마룻바닥 같은 너른 못 안을 소금쟁이 한 마리, 쏜살같이 미끄러지며 물광을 내고 있다. 후두둑, 연잎이 펼쳐든 우산 속을 조용히 찻물이 끓고 있는 이 시간.    

 

5.

정자 아래, 주지 스님 茶布에 먹물 스미듯 차를 내린다. 잎잎마다 온 방죽을 진동하는 향긋한 적멸보궁의 냄새, 비우고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순백의 향기 한 잔, 단숨에 비우고 이내 꽃잠에 든다.

 

* 견향정 - 향기를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정자.

 

- 2009 시산맥 창간호

 

 


 

 

이광찬 시인 / 소리의 유령

 

 

1.

윗집 여자는 매일 아침 수문을 연다. 눈 뜨자마자, 습관처럼 일어나 제 몸을 열고 오줌을 눈다. 밤새 묽어진 몽환의 찌끼들을 몸 밖으로 버리고 여자가 몸안에 갇혀 있던 물길을 툭하고 튼다. 똘똘똘, PVC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천장을 타고 흘러 내려와 저 지하 수천 미터 아래로 방류되는 소리, 소리들.

 

2.

내 귓가에는 비명처럼 한 생을 살다 간, 소리의 유령들이 살고 있다. 모두 한결같이 주인에게 버려진 것들 뿐인, 그 소리들은 때로 아주 멀고도 가깝게 들려오곤 한다. 소리에게도 처소가 있을까. 더는 쓸모없어진 몸뚱이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은 건지 빈 깡통 하나 길 바닥을 나뒹구는 소리, 요란하다. 버려진 것들은 결코 침묵하는 법이 없다. 버려진 순간, 발목이 잘려 허공을 붕붕 날아다니는 소리의 영혼들은 지금쯤 어느 깊은 산중을 두서없이 헤매고 다닐는지 모른다. 개중에는 바닷가 파도에 떠밀려온 소라껍질을 제 집인 양 드나드는 정신나간 넋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대문을 쾅쾅 여닫거나 옆집 유리창을 깨고도 시치미 뚝 떼면 그만인 소리들이 오늘도 밤고양이처럼 덜컹거리는 창문 밖을 어슬렁거린다.

 

3.

종일 떠드는 목소리가 하수구로 흘러가는 물처럼 와서 고이는 반지하 셋방. 밀린 방세를 받으러 왔다가 몇 마디 쓴 욕설로 사라진 주인댁 여자는 언제쯤 저 요란한 수문(水門)을 닥칠 수 있을까? 먼지처럼 흩어진 소음들이 밤새 무덤 속을 헤집고 다닌다. 귓속이 간지럽다.

 

- 2009 [서시] 겨울호

 

 


 

이광찬 시인

2009년 계간 《서시》신인상에〈은하철도 999〉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시산맥 시회 회원, 서시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