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작] 전비담 시인 / 꽃의 체온
겨우내 엠뷸런스가 울어서 그 병원에는 곧 떨어질 이름들만 피었다 영안실로 가는 침대의 난간을 움켜쥐고 절뚝이며 따라가는 얼굴처럼 하얗게 질려서
기어코 봄날 초입에 한주먹 틀어막은 울음이 툭. 떨어진다 이제는 저 혼자 복도를 걸어 나갈 수 없는 것들이 군데군데 멍이 들거나 구멍이 뚫린 채로 하나씩 호명될 때마다 한 줌의 시든 수의로 기록되는,
목련! 하고 부르면 뚝. 뚝. 한 움큼의 하얀 종말이 뛰어내릴 때 찬란하게 하얀 것들에서는 포르말린의 체온이 풍긴다
꽃, 하고 입술 오므리면 죽음, 하고 휘어진 복도를 힘없이 돌아 나오는 메아리
건물 뒤편에서 시신을 말리는 냉각팬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누가 저걸 죽은 꽃들의 누적된 향이 앓는 소리라 했나
목련 피는 소리 갸르릉거리는 밤에는 죽은 내 친구가 입 안 가득 덜 삭은 생을 물고 양치하는 소리 들리지
하얀 꽃색 버려두고 꽃향이 자꾸 내 뒤를 밟는 건 일찍 떠나 비릿해진 꽃의 체온 때문.
전비담 시인 / 죽은 파도에 관한 에필로그
파도가 죽었다 상의 한 마디 없이
성급하게 죽은 파도는 흰 거품을 피우고 암청색 물고랑에 휘청거리다 바다가득 눕는다 바다는 파도가 누운 무덤이다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짐짓 딴전을 피운다
희미해져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심장을 아무리 펼쳐도 품을 수 없다
파도가 멈춰서 모든 미래가 유출되었으니 너무 중요한 허무는 모른 척하기로 한다
다만 다 닳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돌아와 그 무덤에 꽃을 피워야 한다
바다는 낙하하는 해로부터 붉은 꽃씨를 받아 조로한 파도의 무덤에 눈물을 뿌린다
꽃잎이 한 잎 한 잎 피어나는 건 혼자 죽은 파도의 의무거나 도착하기도 전에 해답이 된 미래의 기억놀이
푸른 녹이 슨 물결로 없는 파도의 붉은 말소리를 더듬는 무덤 위
잘 익은 산호꽃인 줄 알았는데 하얀 거품꽃이 피어 있다
바다는 최초부터 파도의 에필로그라는 것, 을 다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전비담 시인 / 로드킬
그날 밤 한 대의 자동차가 하나의 비명과 충돌했다. 비명이 해처럼 부서졌다. 궤도를 일탈하지 않아도 궤도가 달아난 건 아무 짓도 안한 빨간 해에 눈이 멀어 길이 저 혼자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상의 먼지들이 놀라서 양철처럼 가벼워져 튀어 올랐지만 먼지는 다만 먼지일 뿐 금방 가라앉는 유전자를 가진.
금방 사라질 것들은 좀 더 있다 사라질 것들에 재빠르게 밀려난다.
도처엔 맨홀, 부서진 피를 맨홀들이 끌어당긴다. 맨홀은 길 위가 부서뜨린 피의 후속조치. 그러므로 길 위의 일에 대해 길은 아무 짓 하지 않는다.
그날 밤 길 옆 아까시숲에서 목소리마다 가시울음 울던 새 한 마리 결국 자기 부리로 목을 찢고 숲의 경계를 넘었다. 자기 목에 부리를 박은 새는 짹 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날 허공에 한 뼘 새의 자리 지워졌을 뿐 길은 길끼리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길 위의 것들은 붉은 해가 부서져도 그저 사소하게 농담 주고받듯 지나쳐가야 한다.
전비담 시인 / 종소리
동그란 투명이 그늘을 깨우러 간다
잠자는 그늘을 깨우다가 그늘을 꽉 쥐고 있는 못에 긁혀 투명이 빨강처럼 쭈뼛 아프지 그것은 못과 한통속 된 삐죽한 그늘의 소행* 투명이 가끔 빗금 긋는 심장소리 내는 건 그 때문이야
한 가슴의 부서짐을 막을 수 있다면 속고 속고 또 속아도 말없이 부서지는 투명의 주소지는 유리의 영토 그 나라의 언어는 뾰족한 혀도 기꺼이 안아 품는 죽은 조개의 침묵 새의 부리가 유리의 나라를 터트릴 수 없는 까닭이야
후미진 골목 구멍 뚫린 바람벽도 동그랗게 채우는 투명은 바람벽의 땜장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 아무도 보여주지 않는 그곳 가장 높은 종탑 중심에서 돌아가는 커다란 유리알 거울 볼 줄 아는 눈만 보는 투명의 유일한 관객
단 하나를 위해 달려가 스스로 텀벙텀벙 허공으로 뛰어드는 동그란 제병(祭餠)들
*스톡홀름 증후군: 인질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는 심리적 현상.
전비담 시인 / 플래시
꽃이 떨다가 뛰어내리자 캄캄하던 꽃의 살 속에 플래시가 터졌다 뛰어내려서야 환해지는 꽃의 살 속
사뿐히, 날아 그러쥐던 허공을 놓아버리자 꽃 속에서 숨죽이던 도마뱀이 붉게 흥건해졌다
그제야 만져보았다 이빨이 물컹해져버린 물, 비린 쇠냄새가 손가락 끝에 엉겨 붙는 빨간 울음소리는 혀를 빼문 채 고개를 누인 개처럼 경계선을 잃었으므로
울음소리는 이제 곧 팔레트에 옮겨질 것이고 진공의 큐브 속에서 굴절되겠지
램프가 되었다가 담요가 되었다가 빨간 모자가 되다가
쫓아갈 우주의 시간표보다 훨씬 먼저 변형되어 이상한 냄새를 활짝,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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