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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창환 시인 / 저문 날 가야산에 올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0.

배창환 시인 / 저문 날 가야산에 올라

 

 

1

 

내 꿈에도

낯선 땅 어디 잡초더미로 눕지 않으리

 

저문 날 다시 가야산에 올라

눈가루로 흩어지리

 

그리하여 좋은 새봄에, 작고 풋풋한 것으로 다시 오리

 

2

 

내 시(詩) 외에 아무것도 돌에 새기지 말 것

 

내 삶은 거기서 끝나리

 

흙에서 숨 얻어 새끼 낳고

사람 같은 사람 몇 만나고

술 마시고

서정시 몇편 쓰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다면

 

그밖에 다시 더 무엇이리

 

- 시집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에서, 2000 -

 

 


 

 

배창환 시인 / 화법話法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 눈떴을 때

세상은 캄캄한 어둠 덩어리,

누군가 내 입술에, 입술을 포개어 속삭였다

- 으-ㅁ-아, 따라 해 보아!

 

- 으-ㅁ-아, 따라 해 보니

캄캄한 어둠 덩어리 한가운데

으-ㅁ-아, 라는

빛이, 한 점

탁,

켜졌다

 

제주 4.3기행, 지하 동굴, 칠흑 어둠 광장에서

가이드가 성냥을 확, 그었을 때

겁먹은 얼굴들을 되돌려주는 빛을 보며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빛의 자궁임을 알고 말았지만

 

으-ㅁ-아, 라는 빛, 주위로

아-ㅃ-ㅏ, ㅂ-ㅏ-ㅂ, ㄷ-ㅗ-ㄴ, ㅊ-ㅗ-ㅇ......

내 기억회로에 빛이 하나씩 들어오면서

망막이 온갖 빛으로 출렁거리면서

빛은 더 이상 빛이 아니었다

 

어느 숲이었나, 어둠은 도깨비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에서 캄캄하게 뒤엉켜 버린,

발밑을 더듬어가고 있는 이 길이

낭떠러진지 지뢰밭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배창환 시인

1955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 경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1년 《세계의 문학》에 〈1980년 어느 날〉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잠든 그대』,『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백두산 놀러 가자』,『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등이 있음. 「분단시대」 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