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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진 시인 / 기적처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0.

송진 시인 / 기적처럼

 

 

열아홉, 스물아홉

기적처럼 스쳤네

길섶의 들꽃처럼

목이 꺾여 지났네

 

아흔하나, 아흔둘

기적처럼 가깝네

허옇게 뒤집힌 배

노 없이 흐르네

 

세월은, 회한은

기적처럼 가볍네

 

 


 

 

송진 시인 /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호기심은 산을 넘는다

 

 

누군가의 전화가 오고

누군가의 어깨가 흐느낀다

그러나 그것뿐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마주 보며 활짝 웃는 저 아이들도

내일이면 슬픔의 강을 노 저어야 할 것을

쇠오리 떼 중 한 마리가 옆으로 움직이다 살얼음을 밟았다

바시식

살얼음에 자연의 체중이 실리는 소리다

풋-

나도 모르게 뛰어나온 자연스런 웃음

새의 체중은 몇 그램일까

의령 터미널에는 방앗간이 있고

궁류 양조장에는 메주가 있다

갈대 다발처럼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있다

까치와 염소는 까맣고 하얗고 때로는 떼로 몰려다니지

봉황교 강가에 소보루빵처럼 얼어붙은 얼음들

꽝꽝 크림들!

 

 


 

 

송진 시인 / 비밀스러운 음악회

 

 

어두운 객석에 웅크리고 있으면

상냥한 호두가 불을 밝힌다

 

어두운 지하에 누워 있으면

지하의 눈 뜬 자 화장실 들락거린다

 

청룡이 언제부터 눈썹에 날개를 달았나

 

휘그

휘그

 

바람이 휘장을 남빛으로 페인트칠하는 2월의 겨울 낯빛

 

너구리 족들이 굴뚝에 둘러앉아 얼얼한 암표를 챙긴다

 

하루의 시작은 ㅁㄱ ㄹ

 

배고픈 강아지들은 늘 다니던 길을 걸어 다닌다

 

횡단보도는 긴 다리를 들어올린다

 

그들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더 높이

더 높이

 

그러면 간신히 생명이 생명을 이어간다

 

그래도 귀퉁이 물들지 않은 꽃들이 길가에 포름포름

 

쏟아지는 박수 소리처럼

 

봄은 이미 무릎에 앉아있는 미지근한 새싹 차

 

 


 

송진 시인

1962년 부산에서 출생. 1999년 《다층》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옥에 다녀오다』, 『나만 몰랐나봐』,『시체 분류법』,『미장센』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