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환 시인 / 저문 날 가야산에 올라
1
내 꿈에도 낯선 땅 어디 잡초더미로 눕지 않으리
저문 날 다시 가야산에 올라 눈가루로 흩어지리
그리하여 좋은 새봄에, 작고 풋풋한 것으로 다시 오리
2
내 시(詩) 외에 아무것도 돌에 새기지 말 것
내 삶은 거기서 끝나리
흙에서 숨 얻어 새끼 낳고 사람 같은 사람 몇 만나고 술 마시고 서정시 몇편 쓰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다면
그밖에 다시 더 무엇이리
- 시집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에서, 2000 -
배창환 시인 / 화법話法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 눈떴을 때 세상은 캄캄한 어둠 덩어리, 누군가 내 입술에, 입술을 포개어 속삭였다 - 으-ㅁ-아, 따라 해 보아!
- 으-ㅁ-아, 따라 해 보니 캄캄한 어둠 덩어리 한가운데 으-ㅁ-아, 라는 빛이, 한 점 탁, 켜졌다
제주 4.3기행, 지하 동굴, 칠흑 어둠 광장에서 가이드가 성냥을 확, 그었을 때 겁먹은 얼굴들을 되돌려주는 빛을 보며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빛의 자궁임을 알고 말았지만
으-ㅁ-아, 라는 빛, 주위로 아-ㅃ-ㅏ, ㅂ-ㅏ-ㅂ, ㄷ-ㅗ-ㄴ, ㅊ-ㅗ-ㅇ...... 내 기억회로에 빛이 하나씩 들어오면서 망막이 온갖 빛으로 출렁거리면서 빛은 더 이상 빛이 아니었다
어느 숲이었나, 어둠은 도깨비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에서 캄캄하게 뒤엉켜 버린, 발밑을 더듬어가고 있는 이 길이 낭떠러진지 지뢰밭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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