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향숙 시인 / 두꺼운 책
뱉어낼 말들이 겹겹 축적되어 내 몸은 뚱뚱하다 그 지루한 세월의 나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희망 없는 기다림 속에서 어쩌다 흐린 불빛 아래 서성이는 여자들, 나를 선택한 그의 취미는 손가락에 침을 바르며 지루하게 나를 넘기는 것 가느다란 떨림이 딱딱한 각질의 외투를 넘긴다 속옷을 한 꺼풀씩 벗길 때 두 다리의 얇은 경련 난 이따금씩 다리를 들어주고 몸을 뒤집는다
내 속의 천 가지 만 가지 뻗어난 생각들 어떻게 알겠는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꼼꼼히 응시한다 손만 떼면 황망히 오므리는 다리, 미간을 찌푸리며 완강하게 나를 온전히 읽어내기란 너무도 벅찬 체위 배 위에 올려놓고 코를 골다 밀어내기도 한다
다 알기도 전에 지루해지는 그래서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나는 그의 속성 제법 오랫동안 다정한 눈빛을 보내고 같이 호흡을 맞추다 각오한 듯 단호하게 뒤표지를 닫는다 이제 다른 것들의 궁둥이에 짓눌려 촉각을 완전히 닫아 버린 나는 점점 구석으로 밀려난다
성향숙 시인 / 안락사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는 의견 분분했다
지친 호흡기에 의지헤 목숨을 부지하는 늙고 주름진 아기에게 살아생전 가장 편안한 잠이 되리
잘 자라 아가야, 잘 자라 공기야, 잘 자라 쥐야, 고양이야, 바퀴벌레야, 별들아, 바람아, 꿈들아, 꽃들아, 나무야, 잘 자라 예쁜 인형아, 빨간 잠바야, 내일을 향해 가지런히 놓인 흰 운동화야, 잘 자라 세상의 온갖 소리들아, 어둠의 희망들아, 빛의 놀라움들아
-성향숙 시집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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