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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향숙 시인 / 두꺼운 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0.

성향숙 시인 / 두꺼운 책

 

 

뱉어낼 말들이 겹겹 축적되어 내 몸은 뚱뚱하다

그 지루한 세월의 나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희망 없는 기다림 속에서

어쩌다 흐린 불빛 아래 서성이는 여자들, 나를 선택한 그의 취미는

손가락에 침을 바르며 지루하게 나를 넘기는 것

가느다란 떨림이 딱딱한 각질의 외투를 넘긴다

속옷을 한 꺼풀씩 벗길 때

두 다리의 얇은 경련

난 이따금씩 다리를 들어주고 몸을 뒤집는다

 

내 속의 천 가지 만 가지 뻗어난 생각들

어떻게 알겠는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꼼꼼히 응시한다

손만 떼면 황망히 오므리는 다리, 미간을 찌푸리며 완강하게

나를 온전히 읽어내기란 너무도 벅찬 체위

배 위에 올려놓고 코를 골다 밀어내기도 한다

 

다 알기도 전에 지루해지는

그래서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나는 그의 속성

제법 오랫동안 다정한 눈빛을 보내고 같이 호흡을 맞추다

각오한 듯 단호하게 뒤표지를 닫는다

이제 다른 것들의 궁둥이에 짓눌려

촉각을 완전히 닫아 버린

나는 점점 구석으로 밀려난다

 

 


 

 

성향숙 시인 / 안락사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는 의견 분분했다

 

지친 호흡기에 의지헤 목숨을 부지하는

늙고 주름진 아기에게

살아생전 가장 편안한 잠이 되리

 

잘 자라 아가야,

잘 자라 공기야,

잘 자라 쥐야, 고양이야, 바퀴벌레야,

별들아, 바람아, 꿈들아, 꽃들아, 나무야,

잘 자라 예쁜 인형아, 빨간 잠바야,

내일을 향해 가지런히 놓인 흰 운동화야,

잘 자라 세상의 온갖 소리들아,

어둠의 희망들아, 빛의 놀라움들아

 

-성향숙 시집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성향숙 시인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시와 반시》에 〈그랜드파더 클락 세븐맨〉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엄마, 엄마들』,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