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희 시인 / 어머니의 房
어머니, 문 열어 보세요, 제가 어머니를 구해 줄게요. 칙칙한 벽지는 뜯어버리고 야자나무가 그려진 벽지를 발라요. 연둣빛 야자 잎이 싱그러워지면 침대시트로 깔고 야자나무 그늘에 걸터앉아 시원한 코코넛을 드세요. 어머니, 제발 문 좀 열어봐요. 치자 빛 브래지어에 구름 블라우스는 어때요? 양털 카디건에 긴긴 분홍빛 스카프를 두르고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러 가요, 뮤지컬 좋아하시잖아요. 노트르담의 꼽추가 어머니를 지켜줄지도 모르잖아요. 에스메랄다 어머니, 창밖을 봐요, 정원에는 붉은 베고니아가 한창 이예요. 통기타를 잘 치던 스무 살 첫째 외삼촌이 좋아했죠. 가끔 어머니가 가꾼 정원을 거닐다 가는 거 아시죠? 어머니, 문 열어보세요, 내년 봄에도 베고니아를 심으실 건가요? 참, 일곱 살 둘째 외삼촌은 모과나무 가지에 앉아 나비에게 모과꽃잎 구두를 신겨주고 있을 거예요. 열여섯 살 이모는 복숭아 향 가득한 강물 위를 걷고 있겠죠. 어머니, 문 열어 보세요, 외할머니가 깃털만 가득한 부드러운 상자를 보내왔어요. 가-벼-워-지-세-요! 문 열기 힘들면 그냥 달콤한 레몬 밤*을 드시는 건 어떠세요? 두통도 자장자장, 눈물도 자장자장, 근심도 자장자장, 어머니도 자장자장. 그동안 제가 문을 과자처럼 바삭바삭 먹어치울게요. 어머니, 괜찮겠죠?
*숙면을 취하게 해주는 성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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