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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란 시인 / 랩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1.

이정란 시인 / 랩

 

 

갑작스럽게 첫눈의 부름을 받았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뭐가

있는 것처럼 빈 용기를 랩으로 덮는다

 

눈도 마스크를 하고 있어

그의 입가를 살필 수가 없다

 

입과 눈이 서로를 조롱에 매달아도

남의 것을 갖다 붙여도 아무도 모른다

물과 물의 불일치가 수월해졌다

 

물고기는 비늘을

불은 불씨를

알 수 없다

 

랩 안에 잠깐이라는 투명한 새

저 새의 날갯짓을 누가 믿을까

 

비밀에 부쳐진, 눈이 출발한 첫 장소가

저 투명한 새일지도 모르는

 

눈과 입의 불일치처럼

눈(雪)과 투명한 새의 자연스러운 일치!

 

어떤 사물은

모든 처음의 장소를 다 모아

한 번에 불태우려고 세상에 내린다

 

랩을 걷어내고 돌아보니 바깥은 폭설

메마른 폭우라 해도 좋은

 

(『시산맥』2021년 가을호)

 

 


 

이정란 시인

1999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무의 기억력』, 『눈사람 라라』등이 있음.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지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