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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지아 시인 / 유년기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1.

심지아 시인 / 유년기

 

 

여기 낱말들이 작은 어깨를 떨며 누운 곳

 

빈집 찬장 속의 젖은 그릇들처럼

노인의 서랍 속에서 밀가루 반죽처럼 부푸는

전할 수 없는 안부 인사처럼

 

나는 잘 지냅니다

 

찬장 깊이 아끼던 나무 스푼이 있었어

사라진 코와 외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고

꽁꽁 언 젤리 같은 밤의 과육을 떠먹던

 

나는 밤의 놀이터

기찻길을 떠돌던 경적들이 고여 든다

무엇을 향한 소리입니까

 

아주 많은 계단이 있었는데

물이 반쯤 단긴 수통처럼

출렁이며 넘어졌는데

목이 긴 빗자루를 쥐고 건반을 쓸던 쥐들은

낡은 악보 위에서 휘파람을 분다

 

언덕에는 오후와 오전의 성벽들

괴물의 이빨처럼 쓸쓸하게 자라난다

 

커다란 떡갈나무 잎이 떨어진다

나는 의자에 앉는다

왜소한 그림자들이 발끝으로 새어나간다

한밤중 같은 눈을 뜬다

 

 


 

 

심지아 시인 / 회전목마를 타고

 

 

조가비 같아 불이 꺼진 상점들은

 

어둠을 달팽이의 집처럼 이고 손을 흔드는 엄마

 

조랑말들은 회전 속에 표정을 묻는다

 

나는 말의 목을 껴안고

 

플라스틱 목덜미가 휘어진다

 

빈 방에서 고백을 시작하는 말더듬이처럼

 

가만히 흔들리는 커튼들

 

사물 위로 영혼을 벗어 놓는 사람들

 

폐장한 놀이공원에서

밤새 그림자를 박음질한다

 

실패에 감긴 실은 모두 풀려 나갔는데

 

영혼은 공기보다 모호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낮과 밤의 부피

 

과거는 미래처럼 서툴고

 

손 안에는 따듯한 한 컵의 우유가 있다

 

테이블은 미래에서 도착한 지진처럼

 

우리보다 오래 흔들린다

 

 


 

 

심지아 시인 / 보석세공사의 스탠드

 

 

밤의 옷장은 약병들로 가득하다

딸들은 병에 담긴 액체를 몰래 꺼내 마신다

머리카락은 날마다 더 아름다워진다

머리채를 베어 목을 매달고 싶을 만큼

 

내가 지금의 너희들을 낳았지

 

죽은 별의 조각을 웅덩이에 담그면

양손에 안개를 쥔 아기들이 저절로 태어나고

 

그래 그래서 나는 언제나 뿌연 꿈속 같았지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비현실적으로 또렷하고

나는 그 시간을 늙어버린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요람을 흔들며

나는 어리석게 젊어진다

 

꼭꼭 숨었니

눈을 뜨고 술래놀이 했지만

딸들은 용케도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든 기억처럼 몸을 감추고

변기 위에 앉아 나는 그 애들을 부를 목소리를 다듬는다

 

기억나지 않니

요람을 밀며, 우는 너희들의 귀에 속삭였던 송곳 같은 목소리가

살갗은 얼어붙은 날개처럼 부서졌었지

 

깨진 거울을 좁은 작업대 위에 펼치고

딸들의 얼굴이 되어가는 시간

허옇게 물이 빠진 불빛 아래서

나는 핀셋으로 나를 집는다

 

내가 미래의 너희들을 낳았지

 

 


 

 

심지아 시인 / 범람

 

 

양을 세는 일은 문득 시작된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들이 흩어진 풍경이 나타날 때까지

양들이 흩어진 풍경이 고요하게 고집스럽게 구겨질 때까지

 

양들이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될 때까지

양들이 읽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감각이 될 때까지

 

핏속에는 도덕이 없고

나는 조금 슬픈 것 같아

나는 조금 의심하는 것 같아

 

양에게 넘치는 것은 하얀색

양을 세다가 양을 세다가 나는

색깔이 부족해진다

부족한 것은 내게 잘 어울려

나는 조금 아무렇게나 놓인 것 같아

아무렇게나 양을 세도 언제나 양은 그럴듯해지네

 

풀을 쓸면 쉽게 손가락이 베이는 것이 좋아

풀을 쓸면 대지는 오래도록 엎드려 있는

어린 포유류 같아, 기도의 자세니 슬픔을 길들이는 자세니 아가야

 

풀밭에서 얼굴은 건초 자루가 될 때까지

풀밭에서 양들은 입구가 될 때까지

 

부족한 것이 나의 도덕이 될 때까지

부족한 것이 나의 윤곽이 될 때까지

 

목이 보호하는 목소리처럼 고요하게

고집스럽게

양을 세다가 양을 잃다가

 

 


 

심지아 시인

1978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201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로라와 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