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일 시인 / 벚꽃 편지
내일 모레쯤 필까 합니다 당신께만 전합니다 당신도 아실 테지만 봄에 저도 제 맘을 못 붙들어 한 사흘 강진 마량 은빛 바다 위를 이러구러 해찰이나 하고 싶은데 사람들 벌써 지도 위에 귓바퀴 날짜선을 그어가며 꽃 피는 날짜를 귀 세워 물으니 빚 갚을 약속이나 닥친 듯 마음 어지간히 수선합니다 그래도 하루는 작년 봄의 그 여자네 집 비 젖은 홍매화 꽃자리 아래 들러 사랑의 고단함과 덧없음을 옛날인 듯 곰곰 헤아려보다가 물소리 호젓한 자리를 물어 내일 모레쯤 필까 합니다 당신의 그 분에게 기별 전하고 둘이서 오세요 쌍계사 어귀에서 뵙겠습니다
오성일 시인 / 마음의 우기
케케묵은 마음에도 기압골이 있어서 이 마음이 며칠째 우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마음이 꼭 비어버린 토끼장 같습니다 성근 철조망 속에서 씀바귀가 시듭니다
맨발로 앉은 마루 끝에 여름비가 들이칩니다 비 맞는 도라지꽃 보고 또 마음이 쌉싸름해집니다
내 마음은 이대로 스무 날쯤만 습해보자 생각합니다 사랑이든 그리움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곰팡이가 필 때까지 그냥 놓아둬 볼까 합니다
그것도 그런 대로 한 무더기 꽃이어서 두고 보다 한 시절 끝 웃을 날도 있겠습니다
오성일 시인 / 사이와 간격
저녁이 오고 별들이 제자리를 찾아 떠오를 때 어떤 별자리의 꼬마별은, 가령 게자리의 어린별 하나는 어제 떴던 그 자리에 표해두는 걸 깜빡 잊고 제자리를 못찾아 허둥댈 때 있다지
그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리를 맞추주는 건 오래된 떡갈나무라지 가지 하나를 높이 쳐들어 왼쪽, 좀 더 왼쪽 아니 너무 왼쪽 말고 거기쯤... 실눈을 뜨고 간격을 재가며 방향을 맞춰줄 때 게자리 어린별은 게걸음으로 엉덩이를 달싹달싹 놀려가면서 뒤똥대똥 제자리를 찾아간다지 초저녁 유난히 깜빡이며 바동대는 푸른 별이 바로 그 별이라지
떡갈나무가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젖히고 한참을 올려보다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비로소 별들은 일제히 빛을 밝혀 하룻밤의 축제를 시작한다지
눈동자에 별빛을 담은 어진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듯이 나무의 손짓에 눈 맞추며 어린별처럼 제자리를 찾아간다지
친구 자리 먼저 가 빼앗지 않고 남의 자리 제자리라 밀치지 않고 사이와 간격을 지켜준다지 별처럼 어울려 빛을 낸다지
오성일 시인 / 눅눅
김통을 왜 다 열어놓고 먹느냐고 김이 다 눅는다고 밥 먹는 나를 아내가 건드렸다 난 한마디도 안 했다 입천장에 김이 붙어 있었다
잠든 아내의 옷섶을 헤쳐놓았다 가슴뚜껑도 열어두었다 쪽창문을 조금 젖혀두었다
갱년기의 여자 이제부터 긴 건기를 지나야 할 저 여자 달빛에 좀, 꽃숨에 좀, 눅눅해지라고
오성일 시인 / 물음의 행방
구멍난 양말의 그 땐 세상이 얼마나 궁금했던지 궁금한 발가락들은 양말 속에서 얼마나 쉬지 않고 꼬물거렸던지 그 꼬물거리는 분홍의 물음표들 얼마나 당돌했던지 진흙탕 속에선 또 그 발가락들 얼마나 신이 났던지 양말은 얼마나 흔쾌히 구멍을 열어 발가락 말문을 터주었던지 그, 물음이 붐비는 진흙탕은 얼마나 조마조마 살맛이 났던지 그랬던 아슬아슬한 흙맛, 살맛 지금 어디 있는지 내 발가락들은 어디쯤에서 꼬물거림을 멈추었는지 세상은 점점 더 진흙탕이 되었는데 발가락은 왜 더 이상 묻지 않는지, 말문을 닫고 사는지 구멍난 우리들의 양말은 어디 갔는지
오성일 시인 / 검색
벌들도 가끔 부부 싸움 하는지 꽃들에게 물어보렴 어떤 감자는 왜 자주꽃을 피우는지 농부에게 물어보렴 바람도 잘 때 잠꼬대를 하는지 떡갈나무 잎들에게 물어보렴 예쁜 아가씨를 지나칠 땐 새들도 날갯짓을 늦추는지 구름에게 물어보렴 해가 바다에 잠길 때 신을 벗는지 안 벗는지 노을에게 물어보렴 비 오는 날 그림자들은 어디 선술집에라도 몰려가는지 빗방울에게 물어보렴 겨울밤 지하철 계단 할머니의 다 못 판 채소는 누가 사주는지 별들에게 물어보렴
궁금한 것 죄다 인터넷에 묻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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