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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성일 시인 / 벚꽃 편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1.

오성일 시인 / 벚꽃 편지

 

 

내일 모레쯤 필까 합니다

당신께만 전합니다

당신도 아실 테지만

봄에 저도 제 맘을 못 붙들어

한 사흘 강진 마량 은빛 바다 위를

이러구러 해찰이나 하고 싶은데

사람들 벌써

지도 위에 귓바퀴 날짜선을 그어가며

꽃 피는 날짜를 귀 세워 물으니

빚 갚을 약속이나 닥친 듯

마음 어지간히 수선합니다

그래도 하루는

작년 봄의 그 여자네 집

비 젖은 홍매화 꽃자리 아래 들러

사랑의 고단함과 덧없음을

옛날인 듯 곰곰 헤아려보다가

물소리 호젓한 자리를 물어

내일 모레쯤 필까 합니다

당신의 그 분에게 기별 전하고

둘이서 오세요

쌍계사 어귀에서 뵙겠습니다

 

 


 

 

오성일 시인 / 마음의 우기

 

 

케케묵은 마음에도 기압골이 있어서

이 마음이 며칠째 우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마음이 꼭 비어버린 토끼장 같습니다

성근 철조망 속에서 씀바귀가 시듭니다

 

맨발로 앉은 마루 끝에 여름비가 들이칩니다

비 맞는 도라지꽃 보고 또 마음이 쌉싸름해집니다

 

내 마음은 이대로 스무 날쯤만 습해보자 생각합니다

사랑이든 그리움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곰팡이가 필 때까지 그냥 놓아둬 볼까 합니다

 

그것도 그런 대로 한 무더기 꽃이어서

두고 보다 한 시절 끝 웃을 날도 있겠습니다

 

 


 

 

오성일 시인 / 사이와 간격

 

 

저녁이 오고

별들이 제자리를 찾아 떠오를 때

어떤 별자리의 꼬마별은,

가령 게자리의 어린별 하나는

어제 떴던 그 자리에 표해두는 걸 깜빡 잊고

제자리를 못찾아 허둥댈 때 있다지

 

그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리를 맞추주는 건

오래된 떡갈나무라지

가지 하나를 높이 쳐들어

왼쪽, 좀 더 왼쪽

아니 너무 왼쪽 말고 거기쯤...

실눈을 뜨고 간격을 재가며

방향을 맞춰줄 때

게자리 어린별은 게걸음으로

엉덩이를 달싹달싹 놀려가면서

뒤똥대똥 제자리를 찾아간다지

초저녁 유난히 깜빡이며 바동대는

푸른 별이 바로 그 별이라지

 

떡갈나무가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젖히고

한참을 올려보다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비로소 별들은 일제히 빛을 밝혀

하룻밤의 축제를 시작한다지

 

눈동자에 별빛을 담은 어진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듯이

나무의 손짓에 눈 맞추며

어린별처럼 제자리를 찾아간다지

 

친구 자리 먼저 가 빼앗지 않고

남의 자리 제자리라 밀치지 않고

사이와 간격을 지켜준다지

별처럼 어울려 빛을 낸다지

 

 


 

 

오성일 시인 / 눅눅

 

 

김통을 왜 다 열어놓고 먹느냐고

김이 다 눅는다고

밥 먹는 나를 아내가 건드렸다

난 한마디도 안 했다

입천장에 김이 붙어 있었다

 

잠든 아내의 옷섶을 헤쳐놓았다

가슴뚜껑도 열어두었다

쪽창문을 조금 젖혀두었다

 

갱년기의 여자

이제부터 긴 건기를 지나야 할 저 여자

달빛에 좀,

꽃숨에 좀,

눅눅해지라고

 

 


 

 

오성일 시인 / 물음의 행방

 

 

구멍난 양말의 그 땐 세상이 얼마나 궁금했던지

궁금한 발가락들은 양말 속에서 얼마나 쉬지 않고 꼬물거렸던지

그 꼬물거리는 분홍의 물음표들 얼마나 당돌했던지

진흙탕 속에선 또 그 발가락들 얼마나 신이 났던지

양말은 얼마나 흔쾌히 구멍을 열어 발가락 말문을 터주었던지

그, 물음이 붐비는 진흙탕은 얼마나 조마조마 살맛이 났던지

그랬던 아슬아슬한 흙맛, 살맛 지금 어디 있는지

내 발가락들은 어디쯤에서 꼬물거림을 멈추었는지

세상은 점점 더 진흙탕이 되었는데

발가락은 왜 더 이상 묻지 않는지, 말문을 닫고 사는지

구멍난 우리들의 양말은 어디 갔는지

 

 


 

 

오성일 시인 / 검색

 

 

벌들도 가끔 부부 싸움 하는지

꽃들에게 물어보렴

어떤 감자는 왜 자주꽃을 피우는지

농부에게 물어보렴

바람도 잘 때 잠꼬대를 하는지

떡갈나무 잎들에게 물어보렴

예쁜 아가씨를 지나칠 땐 새들도 날갯짓을 늦추는지

구름에게 물어보렴

해가 바다에 잠길 때 신을 벗는지 안 벗는지

노을에게 물어보렴

비 오는 날 그림자들은 어디 선술집에라도 몰려가는지

빗방울에게 물어보렴

겨울밤 지하철 계단 할머니의

다 못 판 채소는 누가 사주는지

별들에게 물어보렴

 

궁금한 것 죄다 인터넷에 묻지 말고

 

 


 

오성일 시인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2011년《문학의 봄》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외로워서 미안하다』, 『문득, 아픈 고요』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