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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근화 시인 /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1.

이근화 시인 /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한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뜨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

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

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직 건너 보지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 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

 

그러나 내 인생의 1부는 끝났다 나는 2부의 시작이 마음에 들어

많은 가게들을 드나들어야지 새로 태어난 손금들을 따라가야지

좀 더 근엄하게 내 인생의 2부를 알리고 싶어

내가 마음에 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인생!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되고 내 마음에 드는 인생을

일월부터 다시 계획해야지 바구니와 빵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접시 위의 물은 마를 줄 모르네

물고기들과 꼬리를 맞대고 노란 별들의 세계로 가서

물고기 나무를 심어야겠다

 

*

 

3부의 수프는 식었고 당신의 입술로 흘러드는 포도주도

사실이 아니야 그렇지만 인생의 3부에서 다시 말할래

나는 내 인생이 정말로 마음에 든다

아들도 딸도 가짜지만 내 말은 거짓이 아니야

튼튼한 꼬리를 가지고 도끼처럼 나무를 오르는 물고기들

주렁주렁 물고기가 열리는 나무 아래서

내 인생의 1부와 2부를 깨닫고

3부의 문이 열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내 인생!

마음에 드는 부분들이 싹둑 잘려 나가고

훨씬 밝아진 인생의 3부를 보고 있어

나는 드디어 꼬리 치며 웃기 시작했다

 

 


 

 

이근화 시인 / 중국인의 책상

 

 

만두는 귀신 이야기

그 속에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다

꿩 고기도 생선 살도 당면도

채울 수만 있다면 귀신의 입술

 

귀신도 취향이 있을까

성격이 있을까

아이들과 여자들과 놀 수 있다면

입가에 무엇이든 묻히고 덤벼들겠지

 

종이 상자를 물에 불려서

쪽쪽 찢어서

만두 속을 채운다면 감쪽같겠지

백번째의 내가 첫 번째의 무서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푸른색 검은색 한 줄씩 칠해

이 무는 수박이다 수박이다 주문을 걸면

 

신경질적으로 길어진 수박을 칼로 자르면

아직 덜 익은 수박이 씨도 없이 웃겠지

 

세상에서 가장 긴 수박을 어떻게 할까

맛없는 고기는 책상 다리와 같다

무너지는 가슴

무너지는 이빨

무섭게 노려보아도 눈동자는 검은색

 

말 한 마리를 구해서

머리에는 고양이를

다리에는 의자를

꼬리에는 마돈나를 붙여서

달리자 중국인의 감정으로

 

 


 

 

이근화 시인 / 종의 기원

 

 

언제 건너가야 할까? 횡단보도 앞에서 그림자는 당당하게 죽었다 익사하면서 태양을 비웃는 자의 내면은 가로수와 같을까? 아직 내 앞에 오려면 멀었는데 바퀴들은 신났다

 

나의 입술을 진지하게 받아주기를…… 우물거리는 자의 내면은 다락방의 꿀과 같을까? 먹다 버린 껌과 사탕같은 것들이 보도블록 위에서 내면과 같이 자란다

 

지난 장마 때 가로등이 잠겼는데 강물속에서 불이 켜졌던 거 알아? 물고기들이 깜짝 놀라 나무에 매달렸는데 나뭇잎의 내면이 더러워진 거 알아? 탬버린과 트라이앵글의 내면은 다른데 너는 콧노래만 부르고 있구나

 

맨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문을 이기고 라디오를 이기고 도마를 이기고 부글부글 끓어오른 뒤에 얌전한 손이 되었다

 

구멍 난 양말속에서 발가락이 빠져나왔고 성기와 같았다 강아지가 컹컹 짖으면서 꼬리를 빌려주었다 이 나무는 내 것 저 나무도 내 것 길거리에 세워진 것들을 향해 착한 꼬리를 흔들어서 좋은 강아지들

 

 


 

 

이근화 시인 / 원피스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원피스가 휘날렸다

물방울이 떨어져 나갈 듯이

 

한 정거장 지나 내렸다

왔다 갔다 하려던 건 아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제발 나를 세워줘요

원피스 속에 갖출 것은 다 갖췄는데

사람들이 날 무시해

 

너의 물방울은 검은색

너의 물방울은 사라져

너는 물방울도 없이

원피스를 입고 어딜 가니?

 

그릇을 많이 쌓아두었어요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머리통 다음이 엉덩이

그 다음은 없어요

 

한 바가지 물로

원피스를 빨아서

드라이로 말려서

물방울을 그렸어요

 

버스를 탔어요

여자들이 횡단할 수 있도록

물방울 맛이 좋도록

 

 


 

 

이근화 시인 / 손만원씨와 슈퍼 옥수수

 

 

손만원씨의 코 길이였다가 얼굴 길이였다가

슈퍼 옥수수는 소주병처럼 통통해집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에 불이 확 일어납니다

슈퍼 옥수수 알은 사탕처럼 달콤하겠지만

 

옥수수 잎사귀를 씹는 손만원 씨의 이는 가짜지요

옥수수 슈퍼 알을 잇몸에 착실히 박아넣고 싶겠지만

육십에 입이라는 기계는 포기한 것 같습니다

말없이도 안 먹어도 살 것 같다고 구름을 보고 말했지요

 

벗겨도 벗겨도 좋을 옥수수들이 저요 저요 합니다

팔뚝이 대단한 손만원씨의 슈퍼 주니어들

정답을 말하고 씩 웃으려는 것일까요

하늘을 찌르는 만원 슈퍼 주니어들

 

옥수수밭에 전화가 울리는 것 같습니다

만원 씨가 받으러 갑니다

 

*

 

가을에는 만원 씨도 편지를 씁니다

지폐에 번호를 매기는 고상한 편지를

장 박사님 옥수수 박사님

슈퍼 옥수수가 슈퍼 돼지 슈퍼 거위에게 갑니다 갔습니다

 

손만원 올림으로 끝나는 편지는 입술로 봉해집니다

만원을 잇몸처럼 아끼는 만원 씨의 옥수수밭에

프리미엄 노을이 지고 가슴에 불덩이를 끄러 시내로 갑니다

옥수수 슈퍼 알 같은 욕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노란 황금 밭이었다가 항구의 이별이었다가

눈물의 바다였다가 개똥밭이었다가

 

물렁한 음식들을 대충 집어삼키는 만원 씨

이 손만원이가 바로 이 손만원이가, 로 이어지며

옥수수 하모니카라더니 주사도 뻑뻑 슈퍼급입니다

 

 


 

이근화 시인

1976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4년 《현대문학》에 〈칸트의 동물원〉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이 있음. 2012. 제58회 현대문학상 시 부문 수상. 현재 〈천몽〉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