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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지아 시인 / 등을 맞대고 소녀소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0.

심지아 시인 / 등을 맞대고 소녀소녀

 

 

테이블 아래에서

아이들은

놀이를 발명한다

생물이 잠을 발명하듯이

 

얼굴 위로 떠오르거나 지는 것들

우리가 기도라고 읽는 것

 

긴 바다뱀처럼 구불구불한

등 뒤를 맞대고

 

쉿, 이라는 말이 좋았다

손가락을 입술 가까이 대고

 

쉿, 이라고 말하는 것

흘러내리는 것

시작되는 것

 

지붕이 부드러워지고

떠오르는 집시들

 

무릎을 꿇고

충실한 초상화처럼

네가 벗어 놓은 우주

우리가 빠트린 것들을 말해 볼래

 

축복을 내리는 허공처럼

수첩 속에서

너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거야

 

 


 

 

심지아 시인 /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의자의 이름처럼

의자에 앉은 쌍둥이처럼

의자에 앉은 이름이 같은 사람처럼

의자에 앉은 이름이 다른 사람처럼

의자에 앉은 긴 이름의 외계인처럼

의자에 앉은 오후 다섯 시의 햇빛처럼

의자가 많은 기차처럼

한 개의 의자가 정지한 밤처럼

한 개의 의자가 사라진 낮처럼

사색하는 코끼리처럼

사색을 중단한 사제처럼

사색에 놓인 시체처럼

로라와 로라,

사랑했던 한 개의 이름처럼

미워했던 한 개의 이름처럼

개처럼 짖는 사람처럼

개처럼 조용해진 사람처럼

이름이 지워진 묘비명처럼

로라와 로라,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로라와 로라,

책상 위로 팔을 올리는 감정처럼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심지아 시인 / 이웃들

 

 

토마토를 손에 쥐었다

 

몸 밖으로

두 개의 심장을

꺼내놓은 것처럼

 

손은 뜨겁고

빛난다

 

손이 이루는

부드러움의 세계

 

으깨짐은 고요한 포옹의 방식일까

열렬한 비명의 방식일까

정물처럼, 갸웃할 머리가 사라졌다는 듯이

 

나는 나의 알몸처럼

나는 나의 온도처럼

멀어지는 낱말처럼

 

여름은 너의 불안에서 딴 토마토

한 알처럼 아름답고

 

물밑에 가라앉은 발목처럼

미끄럽다

 

나는 1초 전의 생각을

1초 후에 지속할 수 없다

 

그 밖의 모든 시간에서

파랗게 토마토가 자라는 것처럼

 

모든 침대는 일인용이다

 

 


 

 

심지아 시인 / 바닷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우리는 고요해졌다

 

풍경과 배경을 섞어

아무것도 낳지 않았다

 

*

 

나는 안으로 들어가 속이 되거나

밖으로 걸어나와 겉이 될 수도 있지만

 

*

 

이제 이것은 우리를 말할 것이다

아주 적게 아주 조금

 

이제 이것은 우리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모래에 발을 담그고

파도에 발을 묻고

 

그리움을 잃어버리고 돌아오는 기계를 상상한다

 

*

 

어떤 사람들은 한 부분이 젊다

 

*

 

물이 되어가는

 

기쁨 속에 있다고 바다는

 

*

 

이것은 되찾으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월간 《시인동네》 2019년 1월호

 

 


 

 

심지아 시인 / 수달 씨, 램프를 끄며

 

 

지구에 태어나 얻게 된 건 현기증이에요 수달씨 둥근 이마로

포물선을 그으며 종종 졸도합니다 아름답게 쓰러지기 위해 물가에

살아요 물고기의 머리를 뜯으며 어린 무용수의 발끝처럼 포즈를

고심합니다 머리 뜯긴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파닥여요 열렬한

격렬함입니다 날마다 나는 더욱 날카롭게 안을 수 있어요

깨지 않는 악몽을 물고 물고기들 내게로 와요 병신들, 큭큭 웃는

우리는 병신입니다 나는 어두운 것에 쉽게 매료됩니다 엄마가 남긴

유산은 악습이에요 구멍 속에 꼬리를 넣어야만 잠들던 엄마의 낮과 낯들,

낮과 낯은 같은 말이었을까요 어둠을 오래 바라보느라

내 눈은 검은 돌멩이처럼 반짝이는 줄도 몰라요 붉은 수초를 등에 감고

물방울을 높이 던집니다 내게 말을 걸 땐 물속으로 들어와요

기괴한 몸짓도 이곳에서는 물의 동작이 됩니다

물결에 지문을 풀면 녹슨 안개가 피어나요

 

-제4회 《세계의 문학》신인상 당선작

 

 


 

심지아 시인

1978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201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로라와 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