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시인 / 잠시 전에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이 땀이 되어 나를 비집고 나온다. 표정 순하던 내 얼굴들이 물이 되어 흘러내려 사라진다. 내 얼굴은 물의 흔적이다. 당신의 반갑고 서글픈 몸이 여름 산백합으로 향기로운 것도 세상의 이치로는 무리가 아니다.
반갑다, 밝은 현실의 몸과 몸이여. 아침 풀이슬에서 너를 만나고 저녁 노을 속에서 너를 보낸다. 두 팔을 넓게 펼치면, 어디서나 기막히게 네가 모두 안아진다. 언제고 돌아갈 익명의 나라는 지금쯤 어디에서 쉬고 있을까.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 또 떠나고 --.
마종기 시인 / 시인의 방
19세기의 촛대에 불을 밝히고 윤기 있는 生木의 책상을 빼면, 시인의 방은 씨암탉의 모이주머니, 샤갈 선생의 진주가 있는 씨암탉이다. 버밀리온색의 작은 눈.
그래서 선생은 몇 해 불란서의 우체국장을 지내고 지금은 죽어서 고향에 돌아가 닭을 치고 있었다. 시인의 방은 프랑크푸릍 암마인의 엽서, 시인의 방은 구라파의 묘한 우표다.
나는 특별 군사 훈련에서 적십자 마크의 철모를 쓴 채 지쳐 쓰러지고 밤이슬에 선잠을 깨면, 시인의 방은 열대 식물을 위한 온실, 지중해를 여행하던 애인은 햇볕에 잘 영글은 자갈돌 두 개를 소포로 부쳐주었다.
어느 땐들 우리는 은둔자의 표정을 존경치 않을 때가 없었지만, 어두운 여름 새벽 산길에서 혼자 눈뜨면 온몸에 이슬을 맞는 은둔자의 흐려진 감각을----기억 중에서도 시들어가는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우리는 한때 세상을 빛나게 하던 중독증을 가지고 있다. 샤갈 선생의 엽서나 자갈돌 두 개. 나는 그러나 아직도 따뜻한 나의 시인의 용도나 궁리해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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