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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종기 시인 / 잠시 전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0.

마종기 시인 / 잠시 전에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이

땀이 되어 나를 비집고 나온다.

표정 순하던 내 얼굴들이

물이 되어 흘러내려 사라진다.

내 얼굴은 물의 흔적이다.

당신의 반갑고 서글픈 몸이

여름 산백합으로 향기로운 것도

세상의 이치로는 무리가 아니다.

 

반갑다, 밝은 현실의 몸과 몸이여.

아침 풀이슬에서 너를 만나고

저녁 노을 속에서 너를 보낸다.

두 팔을 넓게 펼치면, 어디서나

기막히게 네가 모두 안아진다.

언제고 돌아갈 익명의 나라는

지금쯤 어디에서 쉬고 있을까.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 또 떠나고 --.

 

 


 

 

마종기 시인 / 시인의 방

 

 

19세기의 촛대에 불을 밝히고 윤기 있는 生木의 책상을 빼면, 시인의 방은 씨암탉의 모이주머니, 샤갈 선생의 진주가 있는 씨암탉이다. 버밀리온색의 작은 눈.

 

그래서 선생은 몇 해 불란서의 우체국장을 지내고 지금은 죽어서 고향에 돌아가 닭을 치고 있었다. 시인의 방은 프랑크푸릍 암마인의 엽서, 시인의 방은 구라파의 묘한 우표다.

 

나는 특별 군사 훈련에서 적십자 마크의 철모를 쓴 채 지쳐  쓰러지고 밤이슬에 선잠을 깨면, 시인의 방은 열대 식물을 위한 온실, 지중해를 여행하던 애인은 햇볕에 잘 영글은 자갈돌 두 개를 소포로 부쳐주었다.

 

어느 땐들 우리는 은둔자의 표정을 존경치 않을 때가 없었지만, 어두운 여름 새벽 산길에서 혼자 눈뜨면 온몸에 이슬을 맞는 은둔자의 흐려진 감각을----기억 중에서도 시들어가는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우리는 한때 세상을 빛나게 하던 중독증을 가지고 있다.

샤갈 선생의 엽서나 자갈돌 두 개. 나는 그러나 아직도 따뜻한 나의 시인의 용도나 궁리해볼 뿐인 것이다.

 

 


 

마종기(馬鍾基) 시인, 의사

1939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연세대 의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월간 『현대문학』 1959년 1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발표 이후 3회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凱旋)』, 『두번째 겨울』, 『변경(邊境)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등의 시집과 공동 시집 『평균율』Ⅰ·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