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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윤순 시인 / 기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9.

강윤순 시인 / 기적

 

 

소라 담았던 소라껍질

소라게 들인 소라껍질 소라껍질

소라껍질도 괴로울 거야

바닷물이 밀려올 때 소라껍질

바닷물이 밀려갈 때 소라껍질

하지만 소라껍질은 소라껍질

난 안팎이 다른 무늬 따윈 관심이 없어

그런데 쌍고동이 물결 하나로 깔리고

속살이 하얗게 부서질 때

내 귀는 어디로 달아나는가

당신은 어디서부터 흘러내리는가

 

나는 기억상실 환자처럼 저 고동에 몰두하지

뚜우

뚜우

뚜우

지금 나를 감아 도는 나팔꽃은 아침인가요

 

아버지

우리 사이엔 이미 유리벽이 단단하게 자랐어요

난 너무 오랫동안 유빙으로 떠돌았는걸요

당신이 기적으로 기적을 집중할 때

나선형 방파제는

길 속 거울이 됩니다

핑그르르

핑그르르

핑그르르

이젠 그 바퀴를 멈춰줘요 제발

난 이미 까맣게 여물었는걸요

 

소라껍질은 언제까지 소라껍질인가요

소라게는 어디까지 소라게 인가요

 

 


 

 

강윤순 시인 / 절정

 

 

나는 위를 보고 뒤로 돌아섰다

머리 위에 발을 얹었다 나는

숨을 쉬지 않았지만

숨이 날아올랐다 나를

지켜보던 승강기가 빠르게

빠졌다 빠르지 않게 내 혈압이 올랐다

내게 밀착된 압축기가 숨을 몰아쉬었다

배와 다리와 배다리가

동시에 시동이 걸렸다 순간

협곡에서 붉은 샘이 솟아올랐다 그때

구름 속에서 칸나 백 한 송이가

일시에 터졌다 쾌청한 시계가

무너졌다 살아났다 팽팽하게

시작점을 울린 총부리에서 연기가

후줄근히 젖어 내렸다 칸나 속에서 내가

숨은 그림자처럼 두꺼워지고 있었다

강물이 조용히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강윤순 시인 / 고비

 

 

고비가 고비를 찾아왔다

'여긴 사막인데 혹시

삭막으로 잘못 찾지 않았나요?

성애 낀 유리창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을 '맞아요' 눈을 털며

'맞이해야 해요' 고비가 말했다

입체 안경 너머 고개 숙인 기차

여덟 량이 순식간에 고개를 넘어왔다

'고비 무쳐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쇄골처럼 파여진 모래구덩이를 보며

고비가 말했다 '넘어야 해요'

모래 위에 선을 긋고 고비가

소리쳤다 사구 넘어 온 바람에게

어떤 날은 서핑을 하듯이

어떤 날은 단물을 삼키듯이

어떤 날은 책장을 넘기듯이

어떤 날은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말했다 '한동안 넘겨야 해요'

밤이 깊어지고 일력이 팔랑 담을 넘었다

뒷장이 따라 팔랑거렸다

고비사막에 고비가 바람 고삐를 잡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강윤순 시인 / 비밀愛

 

 

강 벽에 나는 너의 눈을 그렸어

강 문에 너는 나의 시계를 그렸지

우리가 강빛으로 물드는 동안

물안개는 커튼을 드리우고

달뿌리풀은 망토를 펄럭였어

수초 사이 알들이 부화 할 때까지

우린 수많은 자맥질을 했지

수중발레리나, 어떤 모션은

루머였고 어떤 모습은 아지랑이였어

발은 손짓이 되고 머리는

뿌리 없는 물풀이었지

꽃창포, 부들, 자라풀, 마름

우린 언제까지 빗물에 젖지 않았어 마르지 않았어

아침엔 물새였다가 저녁땐 누우떼로 변하는

파파라치, 당신들

은 우리를 악플에 걸어두고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했지 언제나 머리맡엔

새로운 레시피처럼 속이 빈 모닝빵을 내 놓았지

우리가 물줄기로 줄넘기를 하고 있을 때

햇빛으로 다리를 부풀리고 있을 때

 

 


 

강윤순 시인

2002년 《시현실》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108가지의 뷔페식 사랑』(한국문연, 2007)이 있음. 2015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입상. 2016년 호국문예작품 최우수상 수상. 2017년 「시와세계」작품상수상. 2019년 지병으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