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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도연 시인 / 독백, 바코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9.

2012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하반기 수상작

김도연 시인 / 독백, 바코드

 

 

오후 세 시가 지나가는 소파에 앉아

어항 속 금붕어와 수다를 떨고 있는 고양이를 본다

가슴에 구멍이 생기면 혼잣말이 많아지지

고양이가 창가 쪽으로 귀를 접어버린다

 

떠다니는 오후가 구름빵을 뜯는다 나는 고양이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준다 햇볕이 하얀 털을 쓸고 있다 시간의 부스러기가 크림거품처럼 부풀어 오른다 시계바늘은 거품 속으로 째깍째깍, 고양이가 빵을 물고 낮잠에 빠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의 층적운 속으로 뛰어든

고양이 울음, 야옹

 

잠시

내가 고양이의 고향인지, 고양이가 내 할머니인지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사물들의 오후가 떠다닌다

 

 


 

 

김도연 시인 / 키치*

 

 

인디언 나라에 배꼽이 깊고 푸른 달 떴다

세 마리 거위가 끄는 수레

찬드라의 눈부신 전언을 손끝으로 받아 적으면

아주 오래전

죽은 사내가 나타난다

 

달빛 지자 풀잎에 새겨진 수바시따 펼쳐진다

종착역에 닿기 전

경전 속에 갇힌 새들을 날려 보내야지

울지 못하는 새의 몸엔

산 자의 영혼이 깃들지 못한다

 

악귀가 창궐하는 깊은 계곡

바가바드기따의 눈 아픈 전언을 두 개의 무덤 속에 새겨 넣어야 한다

 

대지에 떠도는 용사의 귀환을 위해 세 마리 거위가 끄는 수레 아홉 번째 돌산을 넘는다

 

*키치: 존재와 망각 사이의 환승역

 

 


 

 

김도연 시인 / 낙루의 DNA

 

 

최초의 울음은 에덴에서 왔다

내 전생은 먼 좀생이별에서 왔을 것이다

높이로만 가늠되는 슬픔의 성분들

억수의 빗줄기로 뛰어내린다

신성한 것은 원시적인 것

좀생이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나선의 물이랑을 지우며

연잎 위로 뛰어든 빗방울

둥근 흔적으로 몰려다닌다

그 방향을 따라가 보면

흔적 없는 흔적들

찾아갈 주소가 없다

연꽃들은 저들끼리 수런거리며

몸을 납작 기울인다

 

분간 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좀생이별을 찾아 나선 길

젖은 것들이 길을 떠메고 사라진다

 

 


 

김도연 시인

1968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2012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