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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동원 시인 / 깍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9.

김동원 시인 / 깍지

 

 

내 손을 나꿔 챈 그녀에게 아내가 있어 안 된다고 했다. 곁에 벗은 예쁜 속옷은 유채 꽃빛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오늘 밤만이라도 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 갈 수 없냐”고 내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나는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쳤다.

 

돌아보지 말걸, 꿈속 그녀는 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밤부터 꿈만 꾸면, 구름 위로 떠오르는 달에게 올라타는 연습을 한다. 제멋대로 엉켜버린 두 인연이 천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 미친 듯 미친 듯 그녀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한다.

 

 


 

 

김동원 시인 / 오십천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 젊은 내 어머니처럼 향기도 곱던 그 복사꽃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깜박 홀려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갓 서른이 넘은 어머닌 울고 계셨다 내 작은 손을 꼭 쥔 채, 부르르 부르르 떨고 계셨다 그 한낮의 막막한 꽃빛의 어지러움, 난 그 후로 꽃을 만지면 손에 확 불길이 붙는 착각이 왔다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구름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오십천은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해 영덕읍을 가로질러 강구항으로 흘러듬.

 

 


 

 

김동원 시인 / 처녀와 바다

―시간의 저편 너머에 묻힌 h에게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김동원 시인 / 무중력

―오너라, 내 가슴 속에, 매정하고 귀먹은 사람아

(「망각의 강」중에서―보들레르)

 

 

끝내 저렇게 내린 흰 눈 위에 길이 지워지겠구나

 

아들이 올 텐데

 

어둠은 자꾸 병원 격자창에 차갑게 들러붙는데

 

입술로 흘러든 망각은 물이 찼는데

 

아들은 꼭 온다고 했는데…,

 

쉴 새 없이 웅얼거리다 졸아 붙은 치매 입술

 

수북 빠진 머리칼 곁에 헝클어진 늙은 의자 한 개

 

아들이 올 텐데, 아들은 꼭 온다고 했는데

 

함몰된 기억 뒤쪽엔

 

뼈만 앙상한 등 받침만 남은 채

 

복도 계단 밑 웅크린 여자의 눈 풀린 동공 속엔

 

밤새 녹아내린 흰 눈이 또 길을 지우겠구나

 

 


 

 

김동원 시인 /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이거나, 하나 둘 켜지는 저녁 도시 불빛이 그 여자들의 어깨 둘레로 보일 때, 붉게 물든 저녁놀 부드럽게 산정에 입맞출 때, 난 으레히 습관처럼 지녀 온 버릇이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펼쳐 보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속 깊이 움직이게 한 한 줄의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내, 방안을 서성대며 조용히 혼자 소리내어 읊조리는 기분은―참 묘한 것이다. 이 소리들은 나직이 방안 귀를 따라 돌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내려온다. 마치, 누군가 이 시어들에 맞춰 피아노의 선율을 소리내어 들려주는 것처럼. 그러면 놀란 사방의 벽들만이 이 우스운 짓을 왜 하는지 몰라, 킥킥킥 돌아서서 비웃고 있는 것이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제 스스로 힘껏 움직이다 가는 것. 저 창 밖 빈 겨울 나무처럼, 추운 모퉁이 한켠에 비켜서 있다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 푸른 잎사귀의 물관을 타고 올라서, 하늘 위 흐르는 흰구름의 가슴을 뭉클 만져 보면 된다.

 

 


 

김동원 시인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한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4년 『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17년 운당 김용득 자서전 『동화요변』 출간. 2018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편저 『저녁의 詩』 출간. 2018년 대구문학상수상. 현재)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시인협회원.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