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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기원 시인 / 새벽 네 시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9.

강기원 시인 / 새벽 네 시

-G.G에게

 

 

당신의 낡고 낮은 의자, 한 여름의 털외투와 장갑

부재의 음을 찾아 약음기 페달 위에 얹은

당신의 발을 사랑해

 

당신이 사랑한 북극을 사랑해

기도하는 빈 손 같은, 끝도 시작도 없는 푸가 같은

얼음 벌판을 홀로 걸어가는 당신의 굽은 뒷등을

 

보이저호에 담긴 당신의 선율이 목성에서 토성으로, 천왕성에서 해왕성으로 흘러가는 동안

 

어둡고 헐렁한 옷 속에 드문 별처럼 떠 있던 아름다운 녹회색 눈동자

문패를 떼어내고, 신문을 읽지 않고, 장갑 낀 채 목욕하고

곰과 코끼리에게 말러의 곡을 들려주던

 

당신, 음표와 음표 사이 쉼표를 사랑하고

사랑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 썼던

당신을 나는 사랑해

 

단 한 줄의 시도 발표하지 않은 시인이

자신의 비밀을 담은 장밋빛 나무 상자*를 난바다로 흘려보내듯

당신을 보낸 후

 

고기도 야채도 먹지 않던 빈 식탁 위에 색색의 알약들을 가지런히 차린다

새벽 네 시

전화선을 타고 들려올 당신의 사라방드를 기다리며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참조 1

 

계간 『청천문학』 2021년 여름호 발표

 


 

강기원(康起原) 시인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7년〈요셉보이스의 모자〉외 4편으로 《작가세계》신인문학상 당선. 2014년〈쌍봉낙타〉외 1편 《동시마중》에 발표하며 동시 작품활동 시작.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바다로 가득 찬 책』,『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지중해의 피』와 시화집 『내안의 붉은 사막』, 동시집 『토마토개구리』, 『눈치보는 넙치』, 『지느러미 달린 책』 출간.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