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시인 / 깍지
내 손을 나꿔 챈 그녀에게 아내가 있어 안 된다고 했다. 곁에 벗은 예쁜 속옷은 유채 꽃빛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오늘 밤만이라도 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 갈 수 없냐”고 내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나는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쳤다.
돌아보지 말걸, 꿈속 그녀는 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밤부터 꿈만 꾸면, 구름 위로 떠오르는 달에게 올라타는 연습을 한다. 제멋대로 엉켜버린 두 인연이 천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 미친 듯 미친 듯 그녀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한다.
김동원 시인 / 오십천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 젊은 내 어머니처럼 향기도 곱던 그 복사꽃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깜박 홀려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갓 서른이 넘은 어머닌 울고 계셨다 내 작은 손을 꼭 쥔 채, 부르르 부르르 떨고 계셨다 그 한낮의 막막한 꽃빛의 어지러움, 난 그 후로 꽃을 만지면 손에 확 불길이 붙는 착각이 왔다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구름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오십천은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해 영덕읍을 가로질러 강구항으로 흘러듬.
김동원 시인 / 처녀와 바다 ―시간의 저편 너머에 묻힌 h에게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김동원 시인 / 무중력 ―오너라, 내 가슴 속에, 매정하고 귀먹은 사람아 (「망각의 강」중에서―보들레르)
끝내 저렇게 내린 흰 눈 위에 길이 지워지겠구나
아들이 올 텐데
어둠은 자꾸 병원 격자창에 차갑게 들러붙는데
입술로 흘러든 망각은 물이 찼는데
아들은 꼭 온다고 했는데…,
쉴 새 없이 웅얼거리다 졸아 붙은 치매 입술
수북 빠진 머리칼 곁에 헝클어진 늙은 의자 한 개
아들이 올 텐데, 아들은 꼭 온다고 했는데
함몰된 기억 뒤쪽엔
뼈만 앙상한 등 받침만 남은 채
복도 계단 밑 웅크린 여자의 눈 풀린 동공 속엔
밤새 녹아내린 흰 눈이 또 길을 지우겠구나
김동원 시인 /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이거나, 하나 둘 켜지는 저녁 도시 불빛이 그 여자들의 어깨 둘레로 보일 때, 붉게 물든 저녁놀 부드럽게 산정에 입맞출 때, 난 으레히 습관처럼 지녀 온 버릇이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펼쳐 보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속 깊이 움직이게 한 한 줄의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내, 방안을 서성대며 조용히 혼자 소리내어 읊조리는 기분은―참 묘한 것이다. 이 소리들은 나직이 방안 귀를 따라 돌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내려온다. 마치, 누군가 이 시어들에 맞춰 피아노의 선율을 소리내어 들려주는 것처럼. 그러면 놀란 사방의 벽들만이 이 우스운 짓을 왜 하는지 몰라, 킥킥킥 돌아서서 비웃고 있는 것이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제 스스로 힘껏 움직이다 가는 것. 저 창 밖 빈 겨울 나무처럼, 추운 모퉁이 한켠에 비켜서 있다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 푸른 잎사귀의 물관을 타고 올라서, 하늘 위 흐르는 흰구름의 가슴을 뭉클 만져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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