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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순진 시인 / 낙타는 뛰지 않는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9.

권순진 시인 / 낙타는 뛰지 않는다

 

 

날마다 먹고 먹히는

강한 자가 지배하지도

약한 자가 지배당하지도 않는

초원을 떠나 사막으로 갔다

 

잡아먹을 것 없으니

잡아먹힐 두려움이 없다

먹이를 쫓을 일도

부리나케 몸을 숨길 일도 없다

 

함부로 달리지 않고

쓸데없이 헐떡이지 않으며

한 땀 한 땀

제 페이스는 제가 알아서 꿰매며 간다

 

공연히 몸에 열을 올려

명을 재촉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

물려받은 달음박질 기술로

한 번쯤 모래바람을 가를 수도 있지만

 

그저 참아내고 모른 척한다

모래 위의 삶은 그저 긴 여행일 뿐

움푹 팬 발자국에

빗물이라도 고이며 고맙고

 

가시 돋친 꽃일 망정 예쁘게 피어 주면

큰 눈 한번 끔뻑함으로 그뿐

낙타는 사막을 달리지 않는다

 

 


 

 

권순진 시인 / 시인은 언제나

 

 

갖춘꽃의 총화이기 보다는

수분을 앞둔 암술과 수술의 긴장,

꽃잎과 꽃받침의

애매한 경계쯤이나 될 것입니다.

푸르른 숲과 조락한 낙엽

구름 위에 머무는 시선만이 아니라

진탕의 갯지렁이와 함께 섞여

돌돌돌 굴러가지도 못하는

한 알 콩자갈의 변명 같은 것입니다.

잉잉거리는 들개바람과

봉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고

복받치는 울음입니다.

길게 사막을 걷는 이의 수통에 남은

마지막 물 한 방울이며

오염에 더욱 선명한

저 강 물비늘의 표정입니다

 

시집『낙법』(문학공원,2011)

 

 


 

 권순진 시인

1954년 경북 성주 출생, 2001년 《문학시대》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낙법落法』,  『낙타는 뛰지 않는다』와 시해설서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詩』가 있음. 계간  『시와 시와』 편집주간, 대구일보 객원논설위원. 대구일보에 10년째 시 칼럼 연재 중. 제12회 귀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