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류시화 시인 / 소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0.

류시화 시인 / 소금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이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품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이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위해서 흰눈 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칠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 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이 않다

그눈물이 있어 이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 다는 것을

 

 


 

 

류시화 시인 / 생활(生活)

 

 

窓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어둠의 門을 열고

맨 처음 세상으로 나온 아이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아침은 소리없이 움직임만으로 와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

四方에서 입술을 부비며 스며든다

손바닥 위에 놓인 生의 조각들을 쪼아먹는

소망의 뜰에 내린 새 몇마리

앉아있다 날아간 자리

버리고 남은

버릴 수 없이 슬픈 이야기들은 모두

지난 밤의 꿈으로 문질러두고

지금 窓을 닦고 있는 내 손길 아래

세상의 어느 한 곳이 닦여지고 있다

 

톱밥처럼 흩어지는 日常의 책장들

良識은 굳은 어깨뼈처럼 튼튼하지 못하고

길모퉁이에 잠복해 있는

먼지의 덫, 보이지 않는 손들의 굴레

一部分씩 닦여져 나간다

빈 접시에 채우는 하루분의 양심과

빵 하나의 自由로 시작되는

이 아침, 햇빛은 하늘의 층계를 걸어 내려와

無垢한 눈망울을 가진

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어디로 어디로 데려가는가

 

아침의 門을 열고

맨 처음 밖으로 나온 아이의 두 눈

窓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어느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류시화 시인 / 빵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류시화 시인 / 첫사랑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류시화 시인

1958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본명은 안재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80년 시 〈아침〉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 1980~1982년 박덕규·이문재·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를 다수 썼지만 1983년 활동을 중단. 이후 류시화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명상서적을 번역했고, 1988년부터 미국,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거나 인도 여행을 하며 라즈니쉬의 명상서적을 번역했다.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6),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2012)를 출간. 경희문학상(2012)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