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 시인 / 낙타는 뛰지 않는다
날마다 먹고 먹히는 강한 자가 지배하지도 약한 자가 지배당하지도 않는 초원을 떠나 사막으로 갔다
잡아먹을 것 없으니 잡아먹힐 두려움이 없다 먹이를 쫓을 일도 부리나케 몸을 숨길 일도 없다
함부로 달리지 않고 쓸데없이 헐떡이지 않으며 한 땀 한 땀 제 페이스는 제가 알아서 꿰매며 간다
공연히 몸에 열을 올려 명을 재촉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 물려받은 달음박질 기술로 한 번쯤 모래바람을 가를 수도 있지만
그저 참아내고 모른 척한다 모래 위의 삶은 그저 긴 여행일 뿐 움푹 팬 발자국에 빗물이라도 고이며 고맙고
가시 돋친 꽃일 망정 예쁘게 피어 주면 큰 눈 한번 끔뻑함으로 그뿐 낙타는 사막을 달리지 않는다
권순진 시인 / 시인은 언제나
갖춘꽃의 총화이기 보다는 수분을 앞둔 암술과 수술의 긴장, 꽃잎과 꽃받침의 애매한 경계쯤이나 될 것입니다. 푸르른 숲과 조락한 낙엽 구름 위에 머무는 시선만이 아니라 진탕의 갯지렁이와 함께 섞여 돌돌돌 굴러가지도 못하는 한 알 콩자갈의 변명 같은 것입니다. 잉잉거리는 들개바람과 봉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고 복받치는 울음입니다. 길게 사막을 걷는 이의 수통에 남은 마지막 물 한 방울이며 오염에 더욱 선명한 저 강 물비늘의 표정입니다
시집『낙법』(문학공원,2011)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시인 / 잠시 전에 외 1편 (0) | 2022.01.20 |
---|---|
류시화 시인 / 소금 외 2편 (0) | 2022.01.20 |
강윤순 시인 / 기적 외 3편 (0) | 2022.01.19 |
김동원 시인 / 깍지 외 4편 (0) | 2022.01.19 |
강기원 시인 / 새벽 네 시 (0) | 2022.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