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기 시인 / 천화도(遷化圖)
동안거를 끝냈는가 한 벌 옷이 외출을 하네 저당 잡힌 묵언수행과 가압류된 묵은 소유 한 덩이 달 반죽 속에 훌훌 날려 버린다
소몰이 창법으로 쏟아내는 들숨날숨은 팔천 가닥 자비면발을 실실이 뽑아낸 것 늪보다 어두운 숲길을 허기지게 걸어가네 귀를 끌어당기는 꿀벌 색 날갯짓의 처음과 끝 그 사이 길로 네발 달린 짐승이 되어 마침내 기어가서 몇 과 사리로 영근 들꽃 같은 세속의 말 담담히 베고 누워 나뭇잎 경전을 덮는다
어디쯤인가 빙하기 살찐 보름 한 입 베어 물고 잠이 들면 바깥을 닫은 거기서부터 벌써 묽다
*천이화멸(遷移化滅) 깊은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쓰러져 나뭇잎을 긁어 덮는 고승의 죽음의식.
윤향기 시인 / 발자취
실패라는 호수에 잠겨 있는 추락이라는 말은 하늘을 추억하는 이의 하강의 발자취이다
양심이라는 강물에 잠겨있는 염치라는 말은 바다를 추억하는 이의 경고 등대이다
감추다 라는 연못에 잠겨있는 가리다 라는 말은 숲속을 추억하는 이의 구름 한 조각이다
윤향기 시인 / 반신욕을 하고 나와
반신욕을 하고 나와 몸무게를 달았다 젊은 날 한 때 생명을 퍼뜨린 공덕인지 한결 가벼워졌다 소금무게는 저울로 달 수 있으나 그 맛은 저울로 달 수 없듯 나도 한때 생명을 퍼뜨린 거야
윤향기 시인 / 택배가 좋은가요?
봄은 목에 종을 달고 오데요. 파랗게 쑥이 번지면 아지랑이도 돋데요. 먼 산에 진달래 편종 지천으로 지는 듯하여 바라보면 아직은 좀 이른가요? 그래도 안개는 대지를 깨워 귀 밝은 봄이 올 자리를 마련합니다. 곧 그쪽에도 진달래 편종소리 또옥 따 부쳐드릴게요. 택배가 좋은가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은산 시인 / 조응(照應)의 푸른 방향성 (0) | 2022.01.19 |
---|---|
한연희 시인 /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외 4편 (0) | 2022.01.19 |
이은심 시인 / 장미 찾아오시는 길 외 3편 (0) | 2022.01.19 |
김대호 시인 / 허공버스 외 5편 (0) | 2022.01.19 |
송종규 시인 / 죽은 새를 위한 메모 외 2편 (0) | 2022.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