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규 시인 / 죽은 새를 위한 메모
당신이 내게 오는 방법과 내가 당신에게 가는 방법은 한 번도 일치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전언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이 꽃봉오리처럼 터지거나 익은 사과처럼 툭 떨어질 때 비로소 당신이 당도한 걸 알아차린다 당신에게 가기 위해 나는 구름과 바람의 높이에 닿고자 했지만 당신은 언제나 내 노래보다 높은 곳에 있고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낯선 목록에 편입되어 있다 애초에 노래의 형식으로 당신에게 가고자 했던 건 내 생애 최대의 실수였다 이를 테면, 일종의 꿈이나 허구의 형식으로 당신은 존재한다
모든 결말은 결국 어디에든 도달한다 자, 내가 가까스로 당신이라는 결말에 닿았다면 노래가 빠져나간 내 부리에 남은 것은 결국 침묵,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발설했고 당신은 아마 먼 별에서 맨발로 뛰어내린 빗줄기였을 것이다
오랜 단골처럼 수시로 내 몸에는 햇빛과 바람과 오래된 노래가 넘나들고 있다
계간 『애지』 2016년 가을호 발표,, 2017년 제10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시
송종규 시인 / 그리고, 봄
창문이 없는 복도에서 네가 기다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지 않아서 다행인 나의 오른 손,
긴 우산을 들고 네 시 건너 다섯 시 여덟 시 그리고 밤새 앓았던 나의 왼 손,
비상벨이 없는 복도 끝에서 네가 기다리는 사이 십이월의 달력 속에서 꽃들이 출현하고 꽃들이 출현하므로 눈동자가 커진 내 방의 빈 컵,
수많은 법칙이 생략된 사랑 법 때문에 문장이 총탄처럼 휘날리는 그리고, 봄
계간 『시와 세계』 2021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구름은 바람의 생각
눈을 뜨니 눈부신 햇살 아래였다 세상은 온통 빛으로 끓고 있었다 더러 소나기가 오거나 태풍과 우레가 지나가기도 했지만 태양은 한 번도 퇴화 한 적 없는 우주의 배꼽
영원이라는 말은 물 속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하다 지난했던 생애는 물빛의 한 찰나 아니면 꿈의 한 소절이었을지 모른다 생의 압점을 스쳐간 자리마다 아픈 손가락을 밖으로 내밀었다 만약, 피고 지는 꽃들의 법칙을 배반하고 다른 것을 탐했다면 세상은 비루해졌을 것이다 나는 패배했을 것이다
그에게 모든 걸 걸었었다 눈부시던 첫 만남에서부터 일평생, 그의 옷자락을 향해 뒤꿈치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얼굴을 향해 온몸을 비틀었다 관절마다 굳은 돌기가 생겨났다 손가락마다 꽃 핀 이 붉은 핏줄들
태양의 궤도는 한결 같았다 그것은 태양이 존재하는 방식, 아주 가까이서 신비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을 본 적 있고 뜨거운 담벼락, 혹은 열두시의 정면에서 놀라운 음성을 들은 적이 있다
나팔꽃의 줄기는 태양을 향해 기어간 마음의 징표
머리 위에서 하얀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구름은, 바람의 생각
계간 『시와 세계』 2020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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