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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심 시인 / 장미 찾아오시는 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9.

이은심 시인 / 장미 찾아오시는 길

 

 

재건축반대 현수막이 장마에 지워지는 쪽문 근처입니다

 

잔가지를 치려다 서로의 목을 칠까 가시를 안아주는 곳입니다

 

붉음의 머리맡을 넘어가면 누가 죽는다는데 방금이 작아지면서 철조망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다 해도 장미는 또 장미

 

잘 놀던 꽃망울이 무더기무더기 감염되면 아무도 심지 않은 눈꺼풀이 초대될 차례입니다

 

꺾어야 꽃인 걸

붉다고 다 마음이 아닌 걸

무얼까 넝쿨 다음 불어닥치는 이것은

 

첫 화장을 시작하는 눈시울은 피고 지고 뜨거웠고 일정대로 후줄근했고

 

자그마한 채소와 하얀 뿌리와 일요일 같은 꽃그늘을 버스 두 대가 나란히 달리는 이쪽과 저쪽

 

세상을 건드린 건 가시가 먼저였습니다

 

담장과 담장의 간격이 속은 것처럼 붉다고 말했던가요

욱신거리고 후끈거리느냐고 물었던가요

 

천박이 없어서 나는 겨우 붉다 하겠습니다

 

자세만으로 만발하고 숨어있을 때 반반하다 하겠습니다

 

절반은 하늘에 절반은 땅에

위독만이 온전한 꽃망울이겠습니다

 

 


 

 

이은심 시인 /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끼니때마다 호명되는 냄비가 덜컹덜컹 우는 것은 맞지 않는 뚜껑 때문인데

간처럼 졸아붙는 삼중바닥이 되지 못한 까닭인데 이를테면

 

한술 밥에 배부르다는 착각이

한술 밥에 배불리려는 억지가 시궁쥐에게 갉아 먹히는 것인데

 

잊을 만하면 입속의 차가운 말들을 불태우고

그때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밥 먹어둔다는 말은 얼마나 고픈 말이었나

 

숙식제공과 월수입 보장의 한복판에서 몇 개의 뺨을 적시느라 다 써버린 눈물이 배불러오는 공복을 허겁지겁 퍼먹던 그때 밥이 밥을 굶기던 그때

 

꺼질 듯 말 듯한 신화 그것이 연민을 불살라먹던 불씨라는 걸

탈 듯 말 듯한 연민 그것이 불씨를 익혀먹던 신화라는 걸

 

아름다운 불구경을 건너면 뿌리내린 공복에게 젖 물리는 안부조차 누군가에게 먹히는 밥이어서 쉽게 식는 수저에 들러붙는 파리 떼

조롱은 뒷모습으로 웃고

 

약이 바짝 오른 끼니 하나가 밥 얻어먹는 사람을 시커멓게 바라보던 그때

 

 


 

 

이은심 시인 / 오류의 도서관

 

 

세계는 부드러운 오류투성이고 클래식한 생은 누구라도 물려받아야 한다는 그 말은 옳았습니다

 

다음 생의 서문 같은 이 조그마한 오후

모든 책을 다 읽어버린 고요한 나무들의 숲

 

무명의 나는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뒤꿈치를 들어야 합니다

인식의 도끼날이 파르스름하게 스며 나오는 당신은 젊었고 젊어서 죽은 당신과는 고딕체로 마주 앉아 경건하므로 잘 찢어지는 장면엔 침을 묻혀야 합니다 나의 픽션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고양이들 책 밖으로 외출할 때는 모서리를 접고 영원과 우애합니다

 

후끈한 난독을 위해 밀착하는 의자에서 날마다 다른 당신을 탐독하는 나의 번역엔 필경 반역이 수십 년 겉만 핥아온 표지처럼 뻔뻔하고 뻣뻣해

 

첫 장을 넘겼을 뿐인데 밑줄을 다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뒤꿈치 둥근 비를 대출할 수 있을 때 그리운 곳이 먼저 난해해지겠습니다 종이의 독재 그 깊은 질감에 엎드려 졸다가 놓쳐버린 당신 여러 번 읽고도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ㅡ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2021년 7월

 

 


 

 

이은심 시인 / 노크 없이

 

 

독한 에스프레소에 아는 神의 이름을 섞어 마신 건 말하지 않는다 헤어드라이어로 젖은 눈물을 말린 건 말하지 않는다

 

조용조용, 조용은 소리가 너무 커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머리맡

착한 죄를 소독하고 그러다 맑아져서 산소처럼 병색을 잊을까 쇠락한 손톱을 나지막이 다듬고

 

연한 살을 골라 우뚝해지는 검은 글씨의 흘러내림, 집요하게 목만 내밀고 있는 물병과 일인식사환영 같은

슬픔 이하가 다 젖도록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아픈 사람은 반드시 흰 벽 사이에 있다는 건 말하지 않는다 반쯤 열린 문으로 통증이 들것을 타고 온다는 것도

 

우리 중 하나가 창 앞에 서 있기 위하여 노크도 없이 날카로운 소식이 성큼성큼 닥치고 그래야 아플 수 있는 병을 반듯하게 펴서 눕힐 때

응급은 수많은 한 번으로 몰래 뺨을 닦는다는 건 말하지 않는다

 

 


 

이은심(李恩心) 시인

1950년 경남 밀양 출생. 한남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2003년『시와 시학』당선.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2004), 『바닥의 권력』(황금알, 2017)이 있음. 2017년 대전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수혜. 2019년 대전일보문학상 수상. 2019년 한남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