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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대호 시인 / 허공버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9.

김대호 시인 / 허공버스

 

 

허공은 만원버스다

발 디딜 틈은 고사하고 숨쉬기도 힘들다

 

곗돈 떼인 여자가 친정 언니에게 무선 전화를 한다

말을 내보내는 동안에도 여자의 몸은 점점 뚱뚱해진다

머리에 파일로 저장된 분노는

압축이 풀리면서 온몸으로 번진다

여자의 입에서는 속기로도 받아적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일부만 언니의 귀에 담기고 나머지는 허공을 탄다

 

다음 정거장에서

무단 질주하는 카 오디오의 고음이 승차한다

심지어 소리가 되지 못한, 그러나 충혈된 눈빛으로 읽을 수 있는

억울하고 치욕스럽고 한 맺힌 생각들 승차한다

잠자는 사람의 헛소리까지 보태진다

이제 허공버스는 멸균 안 된 말과 생각의 승객으로 인해 고약한 냄새까지 난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퀴가 펑크가 날 지경이다

 

중력도 없이

비어 있다고 믿었던 허공

죽은 다음에 내 혼의 거처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 그곳,

무색무취의 노선을 오가는 버스는 지금 만원이다.

 

 


 

 

김대호 시인 / 딱딱하고 완고한 뼈

 

 

뼈를 만진다

손목뼈를 만지고 광대뼈도 만진다

내 형식을 완성한 뼈의

굴곡이 내 근황이다

 

손가락 몇 개가 뼈의 굴곡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내 안의 습곡을 찾아다니는 일

보다 뼈를 만지는 일이 쉽다

쉬우면서 금방 진단이 나온다

너무 딱딱한 걸 숨기고 있구나

문어같이 기어다니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이 뼈의 완고

한 구조가 불만이구나

 

유치가 찬란한 한낮

새가 날아간 도로 쪽 허공에 손가락을 펴 대보았지만

손가락뼈는 탁본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있는 흰 뼈들의 상세한 근황은 병원에 입원했

을 때 확인했다

 

동면에 들어간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웃고 발랄하고 찡그리고 헛되었는데 그 일체가

동면 중에 꿈꾸는 사건들이었다

 

깨어나기에 적당한 기온이 찾아왔을 때 내 뼈의 배

열은 어떤 현실이 될까

손목뼈를 광대뼈를

현실이라고 믿으며 다시 만진다

 

 


 

 

김대호 시인 / 세월

 

 

나무의 자궁인 꽃은

푸른 잎을 출산하고 곧 폐경이 되었다

 

생식기 없는 잎은 바람의 암내를 맡아도 유혹되지 않는다

잎이 가진 푸른 육체는 날씨의 체온에만 반응한다

낮과 밤의 일교차를 지하의 뿌리가 감지하고 익숙해할 때까지

잎은 자궁이 닫힌 자리에서 활동한다

잎의 활동이란 그저 지극한 것일 뿐 그 지극한 것이 나무의 근육이 되고 주위의 소문이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잎의 집성촌인 나무의 테두리가 무성함의 질서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병원체가 나무의 슬하에 옹이를 새겼다

이 사소하고 작은,

이 사소하고 작고 무서운,

이 사소하고 작고 무섭고 화려안

 

잎이 지고 나무의 궁핍이 깊어졌을 때

당신이 가진 생활의 좌표도 바뀌었다

 

거실 오래된 나무 의자는 곰삭았다

여보 저 의자를 어찌할까요

화장터에 가서 십여만 원 지불하면 태워 준다고 합디다

조금만 더 두고 볼까요

사람이 무서웠던 시절, 산사에 묵으며 밤마다 짐승 울음을 동냥했다

아름답지만 즐거우면서 음란하고 슬픔이 과도한 연주였다

이번 생은 이와 함께할 운명이었다

 

귀가 먼 사촌이 갖다 심은 백일홍 나무는 창문 밖에서 잘 자라고 있다

사소하지만 화려한 먼지가 도처에 풀풀 날린다

그 푹푹한 고전을 읽으며 추풍령행 버스가 지나간다

 

 


 

 

김대호 시인 / 분발해라, 후회

 

 

분발하는 비

24계절이 있는 하루

관절을 손보는 히터

화가 난 밥솥

이것들 속으로 미끄러지는 새

 

화단에 언 국화들에게 밥 한 끼 사 주고 싶은 오후다 얼마 전 옆집 노인이 죽었을 때 부의금도 전하지 못했다 죽음에 단단해진 노인이었는데 어쩌자고 막판에 후회를 했단 말인가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어떤 것을 정성껏 닦아볼 수는 있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치의 시체를 치워야 하지만 그 노동이 힘들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어둠의 근육이 부풀어오른다

핏발선 시선들이 귀가한다

잠수 탄 울분도 돌아온다

마음이 육체를 갖기 시작한다

 

의자는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의자의 눈을 후벼판다 넌 죽어도 싸! 비가 내리고 케냐 커피를 내려 마신다 재즈를 들으며 김기덕의 아리랑을 봤다 선물 들어온 중국술을 다 비웠다 이제 뭔가 해야 한다 의자는 네 다리로 걷고 사랑은 사나운 풍문이 되었다 손톱에 반달이 뜨는 동안 느티나무 뿌리는 집을 갉아먹었다 육친이 아프지만 혈육은 유통기한이 지나 버렸다 어느 날 그대가 내 어깨에 내려 앉는다면 그대 그늘이 지닌 미덕이 되고 싶네

 

 


 

 

김대호 시인 / 나를 스쳐간 눈빛은 자연이 되었다

-류경무 시인에게

 

 

질문이 있었다

새가 노골적으로 지나갔다

틈틈이 메모한 당신이 실종됐다

구름이 모든 것을 장악한 듯 보였다

걸음이 메롱메롱했다

 

나를 스쳐간 많은 눈빛은 자연이 되었을 것이다 고집 센 바위가 되거나 성격이 무양무양한 자작나무 따위가 되었겠지 안부가 궁금하다 통합검색을 해 봐도 흔적없이 사라진 당신, 나는 성인용을 탐하고 바람은 도덕적으로 불었다 민첩한 욕망이 몸을 사선으로 베었지만 글쎄, 몸은 이미 이미지가 아닌가?

 

정체성이 사라진 책

예전과 달라진 콘크리트

공기의 압력을 받는 의자

새생명을 얻은 접속사들

 

빈 병 속에 발칙한 음모가 숨어 있다 집을 짓던 형용사는 어느새 투사가 되었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는 몸을 깎아 창을 만들었다 한번만 없던 일로 할 수 없을까, 하고 부탁한 그의 부주의가 일을 망쳐버렸다 그러나 누군들 이 틈새를 건너뛸 수 있을까 모든 종말의 서두에서 서늘한 한기가 얼굴에 달라붙었음을

 

 


 

 

김대호 시인 / 길들인 파리

 

 

아무튼, 이제 무서울 게 없다

내가 무서웠던 건 간지러움

지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잘랐다

열 개가 다 날아갔을 때

비로소 나는 파리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파리는 삼 년을 수련한 덕분에

내적 필연성을 지닌 식구가 되었다

파리의 목숨을 앗을 수 있는 것은 나와 파리풀뿐

파리도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악몽에 시달리다 꿈 속에서

휘파람에 호명되어 날아온 파리가 꿈 속을 긁어준다

 

 


 

김대호 시인

1967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 2012년 상반기 《시산맥》 신인상 당선. 시집으로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걷는사람, 2020)이 있음. 2019년 천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