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시인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자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뭇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을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장정일 시인 / 눈 속의 구조대
눈이 푹푹 쌓이는 날 반쯤 읽은 책을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파혼한 애인을 평생 사랑하게 될 그는 모르리라 교회는 왜 자꾸 마을로 내려오고 도서관은 왜 자꾸 산마루로 올라가는지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입구는 눈의 나라가 아니었다 119 구급차가 비탈길을 가로막은 골목은 새로 생긴 동네의 정육점 진열대 같았다 갑작스러운 시험은 날씬한 이들만 웃게 한다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자 어지러운 발자국과 바퀴 자국이 보였고 정돈되지 않은 무전기 교신음이 들렸다 형광 옷을 입은 네 명의 구조대원은 산소통을 둘러매고 바퀴 달린 접이식 들것을 끌고 있다
이 월급쟁이들은 곧 누군가를 구하게 되리라 병마개를 삼킨 어린아이를 의붓아버지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했던 여중생을 비트코인에 등록금을 털어 넣고 연탄을 피운 대학생을 연예인에게 악플을 달고 고소를 당한 실직자를 고양이에게 물린 개, 개에게 물린 고양이를 슈퍼마켓 주인은 이 사건이 극적이기를 원한다
가져간 책을 반납했다 이제 누군가는 구조되었으리라 한 명의 약혼녀와 파혼했던 자의 책을 반납하고 세 명의 약혼녀와 연이어 파혼했던 자의 책을 빌렸다 이들만큼 애타게 구조를 바랐던 이들은 또 없으리라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참 잘도 쉽고 거뜬하게 구조된다 청와대보다 우수한 건양대학교 응급구조학과가 있으니!
건양대 응급구조사 국가시험 3년 연속 100% 합격 건양대는 응급구조사 국가시험에 응시한 응급구조학과 수험생 전원이 합격했다고 9일 밝혔다.
첫 졸업생부터 3년 연속 100% 합격 신화를 이어 오고있다. 이 학과는 각종 국책사업을 통한 교육역량 중점 학사일정을 운영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학기 중 건양대병원 10개과에서 임상실습으로 현장역량 중심교육을 하고 있다. 또 평생패밀리제도를 통한 학생 및 진로 상담, 재학생 전원 취업반 운영을 통한 진료 준비, 방학 중 토익몰입교육 등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펼치고 있다.
동문회도 지난 2016년과 2017년에 걸쳐 600만 원의 동문회 발전기금을 모으면서 학과 발전에 일조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눈 속에서 두런거리는 구조대를 다시 만났다 쫑긋 세운 귓등으로 구조대와 마을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어디를 찾습니까?" "현대빌라요." "현대빌라는 저긴데." "거기는 신현대빌라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우리도 모르는 신현대빌라가 이 동네에 있어요?"
우리가 사는 현대 그 잘난 현대가 행방불명이다 죽었다는 신이 자꾸 새로 생겨나 구조대가 찾지 못하는 것은 현대다
소리 없는 경광등이 눈발을 뒤집어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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