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제7회 문학. 선 하반기 신인상작품 공모 당선작 전정아 시인 / 블루침대
방 한 귀퉁이에 놓인 침대에 몸을 눕힌다 세상의 모든 벽은 내 몸에 노동의 무게를 얹어 나를 누른다 몇 시간의 단잠 난 외출을 준비한다 지상 180센티미터*, 영혼의 거처라는 높이에서 유영하는 또 다른 나 노곤한 숨소리로 벽에서 벗어나 히말라야 산 양털매트리스에 누운 나를 본다 꿈의 블루침대! 나는 벽 밖을 날고 있다 총천연색 꿈들로 가득 찬 침대에서 나의 무게는 이미 사라졌다 새벽 다섯 시, 자명종이 잠을 흔들면 소란한 노점의 거리로 나가야 된다 눈꺼풀을 비비며 나를 밟고 뛰어 노는 노동과 인간 사이 튼튼한 스프링을 숨긴 벽과 부딪치며 좌판 위에서 튕겨져야 한다
*스위스의 제네바 대학교 교수인 올라프 블란케의 연구결과
전정아 시인 / 진달래 화전을 기억하다
앞산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꽃봉오리마다 불씨가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성냥을 확 그은 듯 꽃망울이 탁탁 터진다 나는 상비약처럼 보관하고 있던 녹빛 프라이팬을 꺼낸다 기꺼이 화로가 될 수 있을 거 같다 진달래와 나 사이에 흐르는 기름 우리는 끈적끈적했던 날들을 프라이팬에 붓는다 지지지직, 지지지직 산 하나, 마을 하나가 향기 주머니를 푼다 꽃술마다 점점이 박혀 있는 흑점 같은 기억들 앞으로 철썩 뒤로 처얼썩 뒤집기를 반복한다 내가, 산이, 작은 동네가 퍼져 나오는 향기에 노릇하게 익어간다 반죽 위로 편편하게 꽃잎을 띄운다 곧 구순기의 몸을 더듬거릴 진달래 화전 딱! 이만큼만 하겠다 기억이 너무 뜨거워졌다
전정아 시인 / 등의 지도
소의 등에는 하느님이 새겨주신 지도가 있다 땅을 잘 기억하라는 말씀이 부드러운 털마다 새겨져 있다 소는 등의 지도를 질긴 가죽으로 꼭꼭 동여매고 다닌다 길을 걷다가 위장이 허기를 알리면 하늘을 한 번 쳐다 본 후 고개를 뒤로 젖혀 지도를 펼쳐본다 등의 지도가 빼곡하게 복사되어 있는 흙 지도를 해독한 소는 곧 풀이 자라는 곳을 찾아낸다 자신의 등이 왜 흙의 빛깔을 닮았는지 곧 알아차린다 음머어, 음머어 배에 풀을 가득 채운 소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씀을 암송한다 소는 일생 동안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등의 지도만을 섬긴다 아무리 맛있는 고깃덩어리가 보여도 눈 돌리지 않는다
전정아 시인 / 개미에 대한 상상
숲이 매력을 잃은 걸까 달기만 한 꽃의 꿀 똑같은 진드기만 키우는 엉겅퀴 신생의 것을 열망하는 개미는 고층 건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스턴트 식품과 최신유행이 드나드는 집 언젠가 돈에 반한 개미가 사람의 금고에 구멍을 낼지도 모를 일 개미가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 미래엔 무언가 잃어버렸을 때 분실물센터보다 개미의 창고에 먼저 가보라 만물상 주인이 된 개미가 웃음을 철철 쏟으며 당신을 맞더라도 놀라지 말지어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개미 가야 할 길이 벽이라면 뚫어서라도 간다 개미는 어디서 제 생의 화룡점정을 찍고 싶은 걸까 버스에서 지하철로 지하철에서 KTX로 멀지 않아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 개미와 마주칠지도...... 어쩜 개미는 미래 도시 계획을 설계하며 숲 주식회사의 최대 주주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부엌을 기웃거리던 개미가 갓 차려진 식탁 위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좌 아 악 ...... 순식간에 도착한 개미의 전대
그새 나는 페르몬 발자국을 많이도 찍어 놓았다
전정아 시인 / 명자 꽃 피는 밤
밤 골목을 걷는데 뒷집 홀아비가 살고 있는 담벼락 아래에서 명자나무가 꽃잎 펼치는 소리 들린다 며칠 밤이 지나면 켜켜이 꽃잎 쌓아놓고 홀아비의 가문 마음 한 잎 한 잎 받아 적을 속 붉은 명자 꽃 불을 보듯 빤하다 길 다방 미스 리 년 보따리 싸가지고 홀아비 방에 털썩 주저앉아 분내 풀풀 날리며 며칠 살 비벼 대던 년 홀아비 읍내 나간 사이 장판 밑에 숨겨 놓은 피 같은 돈 이백만 원 갖고 튀었다 한다 명자 꽃, 홀아비 욕설 다 받아 적으려면 한 해가 저물도록 꽃잎 피워 올려도 밤이 모자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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