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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내일은 두더지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4.

김왕노 시인 / 내일은 두더지

 

 

 해는 너무 나에게 과분해, 햇살은 호사스럽고 그러나 햇살이 쨍쨍한 날, 빨래를 내다 말리고 방안에 물걸레질하고 마당을 쓸지만 사실 햇살에게는 너무 미안해, 햇살 속에서 저지른 일은 다 죄에 가까워, 꽃을 꺾고 개를 걷어차고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날은 저녁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오후에 일어난 일이었지. 가을햇살에 풀 마르는 소리 향긋했을 때였지. 우리 만나 하행선을 타고 남해로 떠나자는 약속을 깨뜨린 것도 햇살이 쏟아지는 광장이었지. 나의 함성에 내가 취해 정신없던 한낮이었지.

 

 당신을 내가 행복한 햇살 속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 ... 햇살 속에 주렁주렁 매달린 홍로사과밭으로 데려간 적도 없어. 배꽃 햇살에 분분이 휘날리는 날, 눈앞에 끝없이 터진 봄 길을 당신의 손을 잡고 걸은 적이 없어. 난 햇살 속에 미간을 찌푸리지 않는 채 내 좋아하는 문장 속으로 햇살과 거닐었다. 덮어두어 어둑했던 이념서적 속으로 햇살과 걸어 들어가며 너와 무관한 이념의 날을 새파랗게 세웠다. 외곽으로 나가 햇살 쏟아지는풀 밭을 뛰어보자는 네 의견은 철저히 햇살 아래서 묵살 되었다.

 

 당신은 밤을 두려워하고 별과 함께 찾아가나 별마저 음모의 별이라 불렀다. 내가 묻히고 가는 밤의 냄새에 너는 소스라치며 놀랐다.

 

토카타 푸가가 울려 퍼지는 햇살 아래 당신에게 웅장한 사랑의 언약을 할 수도 있고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미 인두겁을 쓴 나는, 당신의 순수가 공포인 나는 토카타 푸가가 울려 퍼지는 밤의 거리를 거닐며 드라큘라 백작처럼 당신의 눈을 바라보고 싶어. 밤은 내 얼룩을 충분히 감춰주고 햇살은 파헤치기에 나는 굴광성이기 보다는 굴지성, 어둠의 이파리 무성한 귀곡 산장을 편애하는 편이야.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으로 뻗고 피는 가지와 잎보다는 뿌리에 갈채를 더 보내, 그것은 사실, 어둠으로 자생적으로 생긴 벌레 같은 나에 대한 변명

 

 그러니 내일은 나 차라리 두더지, 두더지 저주를 받아 두더지,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 맞아도 마땅한 두더지, 두더지, 두더지 내일은 기어코 마땅히 당신에게 버려진 두더지, 두더지 세상에 머리를 내밀 때마다 오함마를 맞고 두개골이 터지고 부서지는 두더지, 두더지

 

웹진 『시인광장』 2021년 10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 『리아스식 사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이 있음.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2018년 올해의 좋은 시상, 축구단 말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시와 경계》주간.